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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경진 Dec 02. 2020

겨울 산책의 쨍한 기운

[07] 2020.12.02

봄의 공원과 초여름의 한강, 가을 궁에서의 산책을 좋아한다. 작정하고 어떤 공간을 찾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동네 한 바퀴를 슬렁슬렁 누비는 정도의 산책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겨울 산책이다.


여름과 겨울은 습기와 추위에 약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다. 그런데 그게 싫어서 집에만 있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지는 경우가 잦았다. 여전히 여름은 힘겹지만, 겨울만큼은 종종 동네를 걸었다. 집에서 입고 있던 그대로 두터운 외투에 목도리 하나를 걸치고 문을 연다. 숨을 쉬면 하얀 입김이 나고, 짧은 헤어스타일 탓에 겨울에 가장 애쓰는 내 두 귀가 금세 빨개진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게 하고 볼이 얼얼해지는 공기를 한껏 쐬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쨍!

걷기 시작한 몸이 군더더기 없이 나를 휘감는 찬 기운에 적응을 시작하면, 비로소 작은 변화들을 발견할 에너지가 생긴다.


2017년 일본 가나자와 여행 중 발견한 자전거 도로

최근에는 포토그래퍼로 활동하는 사이토 하루미치의 에세이 <서로 다른 기념일>을 읽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며 새롭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농인이라는 부부의 정체성이 청인 중심으로 살아온 나의 관점을 송두리째 흔드는 책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쏟아지는 감정과 사고들이 많아 읽기 아까울 정도다. 정말 한 챕터씩만 야금야금 읽어내리는 중인데, 어제는 이런 문단을 발견했다.



생활을 ‘놔둬도 알아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면 또다시 구석구석 세세한 기억을 길러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건 나에게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생활은 알아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보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바다에 놀러 가고 싶어.”라는 말에 해수욕 바지 등을 준비해서 바다로 향하듯이, “반짝이는 별 하늘을 보고 싶어.”라는 말에 불빛이 적은 시골을 일부러 찾아가듯이, “눈밭을 밟고 싶어.”라는 말에 옷을 몇 겹씩 입고 굳이 대설 속으로 들어가듯이, 의식적으로 ‘생활을 보러 가는 것’이다.

- <서로 다른 기념일> 102p


2017년 리스본 여행 중 만난 ‘세계여성의날’ 시위 현장

이 책을 읽고서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거닐었던 길들을 떠올렸다. 관광지를 고사하고 슬렁슬렁 골목을 누비던 시간들이 모두 타인과 나의 생활을 보기 위해서라는 걸 알았다. 창틀에 얹어둔 소품, 전봇대에 붙어 있던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전단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교복 입은 학생들, 나무의 그림자를 담아내는 흙길, 독특한 간판. 모두가 걸어서만 볼 수 있는 생활감이었다.


나는 ‘망리단길’이라 불리는 포은로 근처에 산다. 변화가 많은 동네답게 오가는 사람도, 가게들도 시시각각 얼굴을 바꾼다. 4년 사이에 이용하던 세탁소 세 곳이 문을 닫았고, 우수수 생기던 카페 대신 요즘에는 디저트를 판매하는 숍이 대세다. 생각보다 꽃집과 미용실이 많고, 없어지는 미용실 자리에는 ‘이렇게나 많은데 장사가 될까?’ 싶어도 또 미용실이 생긴다. 망원시장은 언제나 북적대지만 골목으로 살짝만 들어와도 조용하다.


걷다 보면 외롭지 않다. 모두의 생활이 다르지 않다는 보편적 감각과 돌아갈 집이 있다는 안도감도 든다. 집에 돌아왔을 때 벌개진 몸이 노곤노곤해지는 그 감각도 좋다. 내일도 생활을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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