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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경진 Dec 03. 2020

차지연이라는 거울

[08] 2020.12.03

차지연을 2009년 뮤지컬 <드림걸즈> 초연 무대에서 처음 봤다. 그가 맡은 역은 디나 존스의 그늘에서 괴로워하는 에피 화이트였다. <몬테크리스토>의 메르세데스나 <카르멘>의 카르멘을 맡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에게는 빛보다는 그림자 쪽의 역할이 주어졌다. 슬픔이 잔뜩 묻은 목소리와 절규하듯 내뱉는 발성의 영향도 컸지만, 그의 영혼이 그쪽에 더 가까워서였다.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만난 차지연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고 부족한 자신을 탓하는 성향의 인간이었다. 그런 성향에 요령 없이 통째로 자신을 작품에 갈아 넣는 그의 방식은 인간의 음습한 그늘을 다루는 데 특화되었다.


갖은 고통 속에서도 버티고 견디는 <서편제>의 송화, 콤플렉스 가득했던 <위키드>의 엘파바, 사랑받지 못하고 흑화하는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명성황후, 삶의 공허를 온몸으로 드러낸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프란체스카, 자신을 가장 싫어한 <호프>의 호프, 일의 배신 속에서 허우적대는 <그라운디드>의 파일럿.


대체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만 높아 자책하기에 바빴던 나는 늘 차지연의 캐릭터에서 나를 만났다. 무대에 흩뿌려져 있던 열등감과 자기 비하, 질투와 왜곡된 시선, 공허함과 살고 싶다는 의지를 주섬주섬 주어다가 쉴 틈 없이 곱씹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늘 그의 변화를 손꼽아 기다렸다. 자기 소리를 찾은 송화와 원고를 두고 법정을 나선 호프처럼 그도 함께 넓어지고 깊어지며 잠깐이라도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이 바람은 거울을 마주하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그늘이 이해받도록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군분투한 그를 향한 고마움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어이 살리에리가 된 차지연을 만났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그늘에서 빛을 갈망하는 인간. 끝까지 빛이 허락되지 않는 차지연의 살리에리를 보는 것은 그동안의 어떤 작품보다도 괴로운 일이었다. 내용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에게 어떤 변화의 기회도 주지 않는 희곡이 가혹하게만 느껴질 정도로. 그는 객석과 신을 향해 “당신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살리에리의 그 대사를 무대에 홀로 서있는 차지연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스스로는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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