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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경진 Dec 12. 2020

겨울에는 뜨개질

[11] 2020.12.12

우리 아빠가 늘 걱정하는 게 있다. 자신과 외모도 성향도 비슷한 딸이 본인처럼 일에만 파묻혀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아플까 봐. 그 불안은 당연히 나에게도 있다. 취미랄 게 별로 없는 데다, 좋아하는 것들은 모조리 오래전에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뭔가를 배우고 싶다가도, 경험이 없어 못하는 게 당연한데 허우적거리는 나를 봐줄 수가 없어서 쉽게 그만뒀다. 좋아서 했던 건데, 누군가가 잘하라고 다그치면 그걸 또 참을 수 없어 그만뒀다. 포기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진득하게 이어지지 않은 건 세상의 많은 것에 감흥이 사라져서였다. 작은 성공에 만족할 만도 하건만 언제나 이상만 높고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기쁨이 주어질 리가 없다.


그래도 겨울이 오면 언제나 뜨개질을 한다. 기능 위주의 삶을 사는 인간에게 뜨개질만큼 생산적인 취미는 없었다. 방한용품 중 목도리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데다, 상대적으로 난이도도 낮아 쉽게 하나의 결과물이 나와줬다. 여러 색과 스킬이 없이 겉뜨기-안뜨기 만으로도 겨울을 이겨내는 데 훌륭한 무언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단순한 패턴을 고름으로써 손을 열심히 놀리며 생각을 비우기 좋았고, 온통 후회로 가득한 12월에 털실이 주는 따스함과 포근함은 은근한 위안이 됐다. 손에 잡히는 것으로 손으로는 잡히지 않는 정서를 만들어낸다는 것도 좋았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본 게 2013년이었다니...

나에게 크리스마스이브는 연애가 끝난 날이었다. 다른 사람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그 전날 이별을 통보하는 사람이 남자친구였다. 그 이후로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용할 양식을 가득 사들고 집에 들어가 그것들을 까먹으며 드라마 한 편을 정복하고 하나의 목도리를 짰다. 특별한 누군가와의 만남은 없지만, 가장 특별한 나와의 시간을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맘껏 누렸다. 나는 이것이 도피이자 평화라고 여긴다.


올해는 친구의 추천으로 코바늘을 해보려 한다. 오늘 처음 잡아본 코바늘은 생각보다 작고, 뜨는 방법도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런데 잠깐 떠둔 모양을 보니 생각보다 더 예쁘다. 친구는 담요를, 나는 버킷햇을 뜨기로 했다. 각자 양손에 실과 바늘을 들고 따뜻한 난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수다를 떠느라 코가 빠지고 늘어나도 깔깔 웃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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