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2021.03.03
동생은 대학 졸업 후 무작정 서울에 왔다. 내가 서울에 터를 잡고 산 지 3년이 돼가고 있었고, 이벤트 MC 일을 하기에 기회나 페이 면에서 서울이 훨씬 나은 것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지만, 당시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에게 일이 쉽게 생길리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 있었다. 아빠는 그런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버스라도 타고 다니면서 서울 지리를 익혀라.”
나의 이동은 언제나 목적지가 분명하고 그 목적지마저도 다양하지 않아, 새로운 장소를 경험하는 일이 드물다. 아마도 그래서 나라와 도시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는 여행을 선호하는 듯하다. 특별한 목적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새롭게 감각하기 때문에. 나를 아는 이가 하나도 없는 고립된 곳에서 의무와 기대, 각종 강박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야 나는 길을 잃을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보기로 했다. 버스에 실려 서로 다른 풍경들을 비교해보고, 나에게 좋은 동네의 기준도 생각해보고, 그렇게 낯선 곳에서 커피 한잔 하고 돌아오면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좋은 점을 ‘길을 잃고 새로운 자극을 받는 것’에 둔다면 종점 여행은 꽤나 괜찮은 방법이니까.
오후 3시에 271A 버스를 타보았다. 종점은 용마문화복지센터. 이곳이 대체 어느 구에 있고 뭐하는 곳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익숙한 광화문역과 종로 5가(세종문화회관과 두산아트센터로 인식하는)를 지났다. 퀵 오토바이가 차도를 가득 채우는 동대문과 창신동, 동묘를 지나니 각종 시장이 나타났다. 악령시가 여기에 있었구나. 청량리에는 기차역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과일 도매시장도 있었다. 청량리역 근처의 휘경동은 도심의 번잡함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철길이 보이는 동네.
4시 30분이 되어 용문문화복지센터에 도착했다. 1시간 30분이 걸렸다. 1시간이 넘어가니 엉덩이가 아파 ‘앞으로는 1시간이 되면 그냥 어디든 내려야겠다’는 다짐도 해봤다. 종점은 면목동이었다. 마포구에서 시작해 중구, 동대문구를 지나 중랑구까지 왔다. 오늘의 커피는 ‘면목 다방’이라는 곳에서 마셨다. 낯선 곳에서 지는 해가 익숙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