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생각보다 나는 사람 만나는 게 귀찮았다. 요즘 많이들 하는 MBTI의 성향대로라면 나는 대문자 ' I '였다. 약속을 잡아놓고도 귀찮음을 느끼다 약속이 취소라도 되면 그게 그렇게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약속을 잡아놓고 가면 막상 잘 놀았으니 나가는 준비과정이 귀찮았던 것도 한몫했다. 아무튼 술자리가 썩 좋진 않았다.
아버지를 닮아 술 한두 잔에도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만취상태의 취객과 다름없는 꼴을 하다 보니 술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 아이템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종종 모이는 일이 있었다. 모일 때마다 장소는 늘 같았다. 동동주에 사이다를 끼얹어 줄줄 마셔댔는데 난 그게 싫었다.
그들만의 화법일 수도 있지만 난 조금이라도 건전함을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생활을 하고 싶어 했고 이러다 보니 '술을 싫어하는 나'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기게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국토대장정'이 하고 싶었고 볼링이라던지 좀 더 건전한 무언가를 갈구하던 나와 달리 직장인이 되어버린 그들은 한 주 내내 받았던 직장의 스트레스를 술로써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나와 추구하는 방식이 다를 뿐.. 그들 또한 술을 멀리하는 나를 애써 부르지 않았기에 시간이 점차 지나 사회경력이 쌓일수록 연락하기는 껄끄러워졌고 어색해졌다.
학창 시절, 무엇을 통해 서로 뭉쳤는지를 돌이켜보면, 그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인간관계 역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술자리에서 화두는 누군가의 연봉이야기가 주를 이뤘고 상대적으로 나는 연봉도 낮은 데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있는터라 불편한 자리는 더더욱 불편할 뿐이었다.
이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내가 먹었던 잊지 못할 술 이야기를 여러분께 처음으로 털어놓기 위함이다.
설악산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마이크를 조심스레 움켜쥐고 여고생들의 찬란한 눈을 훑으며 조심스레 한마디 내뱉었다.
구, 공, 육, 일 9,0,6,1
잠깐 대학교 이야기를 해보자면, 1학년때 나는 조성모 '아시나요'와 K-2 '그녀의 연인에게'라는 노래를 장기자랑에서 부른 경험이 있다. 잘한다 했다. 아무튼 그럴 거다. 문제는 축제 예선전에 눈을 감고 부른다는 이유로 광탈했지만 그런 느낌을 매우 좋아한다. 무대에 서서 나의 장기를 보여주는 자랑을 좋아한다.
심장이 뛰는 걸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유튜브에 일반인 라이브영상 같은 것을 보며 대리만족 하고 있다. 아무튼 게임으로 시도하려 했던 관종은그런 무대의 갈증을 늘 느끼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마이크 선을 왼손으로 두 바퀴 감아 꽉 쥐고 적당하고 팽팽하게 조여 긴장감을 완화시켰다. 마이크를 입에 적당히 붙여놓고 부여잡은 오른손을 눈두덩이 쪽으로 가져다대 락커처럼 포즈를 취했다.
싸이의 챔피언 전주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버스는 들썩였다. 진정 즐길 줄 아는 학생들이 이 나라의 꿈나무입니다.
모두의 축제. 나는 열창했고 학생들은 환호했다. 팔뚝에선 소름이 돋는 걸 보니 나는 이런 무대를 좋아했다. 여고생들은 웬 낯선 아저씨의 열창에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었고 나는 오래간만에 낯선이 들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1절이 끝나고 흡족하게 다시 반장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박수세례가 이어졌고 나는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느낌으로 자리에 착석해 나지막이 선생님의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귀를 통과하는 것을 느꼈다.
직업만족도 최상!!
약 4시간의 고속버스로 속초의 설악산 부근 숙소로 향했다. 학생들을 인솔하는 선생님들 뒤로 나는 미리 지정해 주신 방을 부여받았다. 물론 2인 1실이기에 마음 편히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아이들을 인솔하는 방송소리가 들리는 동안 나는 가방을 풀어놓고 멍 때리는 게 전부였다.
요즘에야 스마트폰만 있어도 할 가짓수들이 많았지만 당시 내가 쓰던 휴대폰은 KTF 샤인 TV 슬라이드 폰이었다. DMB라는 게 유일한 기능이었지만 그 조차도 산 쪽이라 나오지 않았고 TV도 없는 적막함 그 자체의 방이었다.
외로워서 찍은 16년 전 나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다 나의 룸메이트 선생님께서 문을 벌컥 열고 손짓을 하더니 빨리 나오라 하신다. 이유는 그저 저녁을 먹기 위함인데 어째서 저리 다급할까.
큰 문과 쪽문을 지나 여럿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오래된 나무 테이블이 있는 공간에 나를 적당히 앉혔다. 이미 선생님들은 잔뜩 군침을 다시며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이라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식사는 편히 즐길 수 있었고 나는 어차피 계약에 포함된 몸,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숙소를 관리하는 그분(관리자라 칭하겠습니다)이 갑자기 어디선가 큰 술을 두 병 내오더니 테이블에 텅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하나는 인삼주 하나는 뱀술입니다.
호탕한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내드는 장수처럼 내질러대는 모습이 나는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업만족도가 최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마다 할 순 없잖는가. 자그마한 양주잔에 인삼주 한잔을 먼저 담았다. 오늘도 고생이 많았다는 학년주임 선생님의 멘트 이후 작은 짠 소리. 그리고 크으 하는 목 넘김을 뒷받침하는 강렬한 멘트들이 울려 퍼졌다.
들이키는 인삼주는 식도를 타고 촤아악 내려가 위까지 도달해야 하건만, 인삼주는 내장 여기저기 계속 휘저어대는 기분이었다. 크억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강렬했다. 물론 나이가 있으신 학년주임 선생님은 만족도 최상!
"이번엔 뱀술 한번 드셔보시죠 하하하"
하하하. 뱀술은 똬리를 튼 뱀이 정말 병 안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정말 받기 싫었다. 정말 뛰쳐나가고 싶었다. 친구들과 술자리도 싫었던 내가 쌩판 모르는 선생님들과 여기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질 안....
원샷입니다!!!
쑤욱 들이키니 속이 매스껍고 따가웠다. 뱀술이 아니라 칼술 아닌가? 바늘술인가? 내장 여기저기를 따끔따끔하게 후벼대는 느낌이 들었고 누군가에겐 중독성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맛있다고 극찬하는 관리자와 학년주임 선생님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대며 복분자주가 그나마 달다며 들이키다 그만 정신을 놓치고 말았다. 동화 핸젤과 그레텔을 아는가? 그 동화에선 아이들이 지혜를 짜내 바닥에 돌을 떨어뜨리며 길을 확보해 나간다.
입에 고인 무언가를 황급히 틀어막았지만 나 또한 동화 속 아이들처럼 바닥에 무언가를 떨어뜨리며 화장실까지 길을 확보했다. 누가 봐도 나는 화장실을 가고 있었다. 선명한 액체들만이 점선을 만들어 낼 뿐.
입으로 비둘기를 한 껏 뱉어낸 후 비틀거리며 화장실에 나와 죄송함을 선언하고 방으로 돌아와 누웠다.
방 침대에 누워 노래를 부르던 내 모습과 푸덕이는 비둘기를 뱉어내던 내 모습이 교차로 지나가며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올 무렵 학년주임 선생님은 인삼주 남은 걸 들고 싱글벙글 방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방에 앉아 인삼주를 들고 2차전을 진행했다.
희한하게 한 번 뱉어 낸 뒤라 잘도 들어갔고 선생님의 진솔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38살의 젊은 선생님은 16년 후의 지금 은퇴를 하셨거나 더 높은 직위에 계실 것이리라.
그 선생님은 31살에 선생님을 시작해 7년째라 하셨다. 힘이 든다고도 하시고 일이 맞지 않아 괴롭다고도 하셨다. 만족스럽지 않은 급여라며 앞자리 숫자가 내 두 배쯤 되는 것에 힘 내시라는 뜻의 나 같은 놈도 잘 살고 있음을 언급하며 촌철살인급 월급 커밍아웃을 했다. 크게 위안이 되는 눈동자를 세심하게 미안한 듯 굴리시더라.
난 그저 사진기 들고 사진 찍으러 온 직원일 뿐인데. 그렇게 각자의 직장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내가 그간 다녀온 여러 가지 수학여행이나 소풍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롤러코스터를 타는듯한 감정의 하루를 보냈다. 어렴풋하게 부장과 실장이 왜 나에게 재밌는 곳이라 설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씻고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 무렵 선생님께서 소름 끼치는 한 마디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