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 직장에서 방출(?) 되어 사진사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낯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처음 보는 스튜디오로 출근해 처음 만져보는 카메라를 익숙하게 다루는데 처음엔 제법 애를 먹었다.
경력 20년의 부장은 나에게 와서
이게 '뷰파인더'고 이게 '버튼'이니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어라. 많이 찍을수록 늘어간다. 일단 처음엔 막 찍고 막 저장해라. 그게 정답이다.
정말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때려치울까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깊게 해 본 날이었다. 모쪼록 파견 이후 한동안은 부장을 따라 프로필 사진 촬영을 위해 지원을 같이 다녔다.
자그마한 다마스에 장비를 한가득 싣고 내부에서 학생들을 찍고 야외에서 학생들을 찍었다. 물론 내가 찍는 건 아니고 뒤에서 배웠다. 가끔 부장이 자리를 비우면 내가 직접 촬영하며 감각을 익혔다.
현장사진은 큰 철학 없어! 얼굴 안 가려지게 최대한 넓고 '이쁘게' 찍으면 돼!
라는 경력 20년 차의 부장의 말 또한 정답에 가까웠지만 첫 도전의 나에게 맞는 말인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며 나는 대구의 다양한 초, 중, 고등학교의 운동회, 체육대회, 소풍, 수련회, 현장체험학습, 수학여행 등등을 가게 되었다. 부장의 몸이 두 개 세 개가 아닌 이상 모든 학교를 다 다닐 수 없기에 나는 여기저기 팔려나갔다.
여기저기 팔려나갈 때 이렇게 나름대로 편집도 해보곤 했다.
나는 과연 돈을 받고 일을 배우는 걸까, 아니면 내 열정과 시간을 불살라 희생하는 걸까? 당시 내 삶은 어디를 기준으로 두느냐에 따라 달리 보였다.
어떤 날은 손해처럼 느껴졌고, 또 다른 날은 값진 경험이라고 여겨졌다.그래서 항상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일 출장비 2만 원이라는 헐값에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러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피크타임땐 하루에 두 곳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선생님들에게 나를 알리는 그 짧은 시간은 매우 고역이었다. 위아래로 훑어대며 젊은 내 모습에서 얼마나 신뢰감이 없었겠는가.
운동회 촬영 당시 스포츠 사진 기자님이 찍어주신 나
수백 명의 학생들이 저마다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형 잘생겼어요'라는 이상한 소리들은 걸렀다. '찍새'라는 말에 불 같이 화를 내고 직업에 대한 존중을 해야 된다는 훈계 아닌 훈계도 해댔다. 물론 선생님이 안 볼 때..
일은 참 재미있었다. 생전 처음 가보는 국회의사당. 국회의원들이 자주 힘겨루기(?)를 하는 그곳 정면엔 '국회'라는 큰 글자와 더불어 로고가 새겨져 있는데 TV에서 보던 것과 달리 엄청나게 큰 것에 놀랐다.
그리고 청와대. 이건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기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청와대 내부에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도 볼 수 있었고 요즘은 모르겠으나 당시엔 노루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건물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도 들으면서 사진도 찍었는데 참 돈주고도 못 살 경험이었다.
부장은 에버랜드가 너무 싫다고 하여 에버랜드 소풍이 있을 때마다 나를 보냈다. 에버랜드는 한 달에 1~2회는 꼭 갔고 3회차쯤 부터는 선생님들이 쉴 수 있는 장소까지 가이드도 했다. 그만큼 익숙했고 설레임은 줄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노는 걸 좋아해서 얼떨결에 같이 T익스프레스를 타기도 했고, 그분들의 추억을 위해 거리낌 없이 사진을 찍어주고 전송해 주었다. 마치 커플사이에 낀 솔로의 심정이랄까.
요즘은 이런 서울상경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나 다양한 곳을 간다는데 이제 사진사 없이 선생님들이 직접 찍는다는 말도 얼핏 들은 것 같다. 요즘은 어떨까 싶다.
그때 나는 일을 핑계로 공짜 여행을 다녔으니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직업만족도 최상이라는 말을 이때 쓰는구나 싶었다. 참 오길 잘했다 싶었고 오실장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전화도 자주 드렸었다.
적어도 설악산 수학여행을 가기 전 까지는 말이다.
이름만 들어도 겁이 나는 설'악'산은 여고생들의 2박 3일 수련회 코스였다. 상큼 발랄한 여고생들과의 첫 조우였다. 지금껏 남녀공학이나 중학교 위주로 많이 다녔기에 이는 매우 생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여고생 수백 명이 모여있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들을 만나 가볍게 인사하고 목적지 어디쯤에서 사진을 찍을지 미리 뷰포인트를 체크했다.
부장님과 실장님은 설악산을 적극 추천해 주었다. '우리는 이미 많이 가봤고 너무 재밌지만 너에게 양보'한다고. 그러기에 난 설악산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안고 학교를 향해 갔을 뿐이다. 설마 산을 타겠어?
나는 고속버스 제일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뒤에선 한창 노래자랑 시간이었고 난 묵묵히 노래를 들으며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노래를 듣다 보면 무대에 올라가 열창하던 내 과거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웬걸, 갑자기 반장이 마이크를 들고 오더니 옆의 선생님에게로 불쑥 내밀었다. 선생님은 마이크와 나, 그리고 반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나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정말 하기 싫다는 억센 표정으로 나에게 구조신호를 계속 쏘고 있었다.
"아이고. 선생님 노래가 듣고 싶으신 것 같은데요?"
내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선생님의 얼굴이 굳었다. 그 눈빛은 날 향해 말하고 있었다.
'제발, 나 좀 살려줘.'
짧은 시간 눈알과 머리를 굴리며 이 급박한 상황을 빨리 수습해야겠단 마음뿐이었다. 나는 반장이 건네는 마이크를 조심스레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뱉었다.
"혹시 괜찮으면 이 사진사 아저씨가 한 곡 해도 괜찮을까요?"
환호성과 괴성이 버스 안을 울려댔다. 나는 수습하지 못할 말 이란것을 알면서도 내심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언제 한번 여고생들에게 내 노래를 불러줄 수 있을까? 버스 안은 축제분위기였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학생들의 시선이 나를 꿰뚫듯 쏟아졌고, 머리 속은 하얘졌다.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