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의 시작은 고등학교 4학년과 같다. 철딱서니 없지만 어른인 척하고,주민등록증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여기저기 꺼내서 어른이 되었음을 자랑하는 것. 더불어 갓 성인이 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술판이 벌어지는 시기이기도하다.
주먹보단 법을 찾아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고등학생때와 접근하는 문화도 많이 달라진다. 아무튼 나는 그런 문화적인 것이 썩 달갑진 않았다. 왜냐면 대학교 문화생활의 꽃은 결국 '술' 하나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반의 학우들 중 절반이상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늘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같이 택시를 타고 귀가했고, 나는 버스가 끊기기 전 헤어져야 하다 보니 아쉬움이 항상 자리 잡혀있었다. 약간의 소외감 같기도 했다.
집과 학교의 거리는 채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기숙사를 택했다. 물론 위에 서술한 대로 술을 늦게까지 즐기기 위함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정작 가장 큰 문제는 1시간을 일찍 나와 내가 탈 버스를 기다려도 만차버스 상태의 버스만 계속 지나가는 기현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3대째 보내고 4대째 되어서야 겨우 타서 지각을 면하곤 했다.
앞문이 열리면 금세 튀어나올 것 같은 여러 명이 원망의 눈초리로 뒤를 흘긴다. 언짢은 나 또한 그들의 허리춤과 어깨너머로 오른손을 집어넣어 '삑 학생입니다' 소리를 듣고 뒷문으로 전력질주 해 억지로 누군가의 몸을 밀치며 뒷문에 매달려 탑승했다. 공포 그 자체였다. 문짝이라도 날아가면 난 어디로 튕겨나갈까.
이러한 환경을 교수님께 읍소했다. 버스에 매달려 가는 건 너무 가혹합니다요. 직장인의 노선에 같이 얽혀가는 건 너무도 괴롭습니다만. 매일 튕겨나갈 것 같은 공포에 시달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타 지역에서 오는 학생들만 기숙사를 이용가능하도록 배려할게 아니라 나도 같은 대구일 뿐이지 사실상 장거리 아니냐며 항변했고 몇 번의 설득 끝에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깍쟁이 친구가 한여름에도 춥다고 이불을 덮고 있거나, 여름방학 동안 컴퓨터를 기숙사에 놔두고 갔는데 램을 빼서 자기 컴퓨터에 꽂은 룸메이트 일화는 추후 다른 브런치북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단 말 하나로 고민 끝에 들어간 대학교에선 다양한 수업을 배웠다. 컴퓨터와 관련된 대부분을 배우며 나름 중간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교수님의 눈에 띄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어느 누구에게 주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그냥 늘 하던 대로 놀고먹고 공부했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술 한잔 후 PC방에서 놀다 기숙사 출입시간을 넘겨 들어가지 못한 적이 있었다. 기숙사는 알다시피 밤 11시~12시 사이에 출입이 금지된다. 어디 노숙은 할 수 없는 노릇이라 건물 내 강당 앞 의자에 누워 밤을 새우다아침이 되어서야 어렵게 기숙사로 향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잠깐 자고 1시간 뒤에 보자며 손을 흔든 뒤 씻지도 않고 침대에 퍼졌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짹짹거리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잠을 잘 청했음을 알려주었다. 알차게 울려 퍼지는 새소리덕에 내가 알람을 맞추지 않았단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고 2교시가 통으로 날아갔단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눈을 뜨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부랴부랴 친구들을 깨워 멸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3교시 수업시간에 맞춰 전력질주했다.
"교수님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초라하게 부서져버린 신뢰는 쌓는 것보다 무너뜨리는 게 훨씬 쉽다. 모래성은 무너지면 다시 쌓기라도 하면 되지만 교수님과의 신뢰는 무너지는 순간 인간실격이 되어버린다.
이 덕분에 난 장학금 후보에서 탈락했다. 다른 의미로 나는 참 운이 좋은 놈이었다. 동기들은 몇 번을 지각하거나 빠트려도 출석체크 때마다 교묘하게 빗겨나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난 그 '딱' 한 번에 '딱' 걸렸다. 복권 3등급 행운인가.
교수님은 한 번 기회를 주겠다며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바로 근로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제안.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겠습니다' 외쳤고 그 덕에 인생 처음으로 '일'이란걸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대학교 내의 도서관 사서 업무였다.
대략적인 포스기 사용법과 전산을 만져야 하는 업무이기에 도서관 담당 교수님께 속성교육을 받았다. 나의 민원인은 모두 학우들이었고 선배였으며 진상들이었다.
책 반납이 지연될 때마다 연체 안내문구가 전산을 통해 올라오면 민원인들에게 전화를 돌리곤 했다.하루이틀 연체자들은 미안함을 느낀다며 빠르게 반납을 하러 왔다. 장기연체자들은 마치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는 양아치 같았다. 같은 학교 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본인의 논리를 합리화시키거나 화를 내는 등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술 먹고 있는데 왜 전화하냐'라고 생짜증을 내는데 정작 '오후 4시'에 전화해서 그 짜증을 듣고 있는 내 심정은 어떨까? 반대로 생각해서 그 시간에 학생이 술을 잡수시는 게 과연 정상적인 상황인지 이해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학교의 자산을 빌려가 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저 태도는 무엇인가. 어쩌면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빚쟁이들의 에티튜드. 그리고 내가 내는 세금만큼의 대접을 받길 바라는 그 어떤 누군가의 잣대와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이 덕분에 나는 사람을 대하는 업무에 있어선 자신감이 심히 결여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과거의 도전과 아픔으로 다져진 내 멘탈은 그러한 몇몇 종자들로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교수님께서 내리신 임무를 완수해 냈고, 나는 비록 장학금 전액은 아닐지언정 절반의 지원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단순히 보상을 받는다는 개념을 넘어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의 축소판을 느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렇게 근로장학금도 받으며 알찬 대학생활을 보내던 중, 교내에선 자격증 공부를 위한 기회를 많이 주었다.
기왕 나도 들어온 대학 자격증이라도 하나 따보자 싶어 '사무자동화산업기사' 자격증 도전을 시작했다.
다만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교재를 보자마자 금세 후회라는 놈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책 대신 PC방이나 음주가무와 친해지며 시험과는 아득히 멀어져만 갔다.
시험을 불과 1주일 앞두고서야 각자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자 기숙사 앞 휴게공간에 모여 라면을 먹으며 도원결의를 맺었다. 딱 1주일간 미친 듯이 공부하자고 전우 3명과 뜻을 같이 했다. 밤도 새 가며 벼락치기를 시작했다.
그 덕분일까? 준비가 다소 부족했던 전우 1명을 제외한 모두(물론 나를 포함해) 합격의 쾌거를 이루었고 다소 쉬웠던 실기시험까지 당당하게 합격하여 인생 두 번째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물론 고등학교 때...
각 지역별로 꿈을 갖고 내려온 학우도 있었고 4년제 졸업 후 취업이 쉽지 않아 다시 이 학교로 입학한 형 누님도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해 MBC 방송사에 자막팀으로 취직하기도 했고,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으로 이직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길은 많이 열려있었고 어느 길을 갈 것인지는 온전히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었다. 그런 면에선 난 늘 남들보다 노력이 부족한가 싶었다.
이맘때쯤 나는 군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고 선천적으로 다소 문제가 있는 눈 덕분에 '신의 아들'로 면제가 되었다. 물론 2017년 개정 이후부터는 3급도 받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땐 그랬다.
그 덕에 나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했다. 여러 차례 면접을 보았지만 어린 나이의 나에게 면접관의 태도는 대체로 으름장을 놓거나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면접자를 무시하는 태도를 자주 느낄 수 있었다.
몇 번의 면접 끝에 집에서 버스로 30분 만에 갈 수 있는 모 인쇄회사로 발을 딛게 되었다. 비전은 없었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나와 면접을 보았던 실장과 부장은 틀에 박힌 '동반성장'이란 말보다는 좀 더 진심 어린 말 들로 나에게 조언을 건넸고 이는 나에게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졸업 전 '2005년 11월 28일' 추운 겨울 어느 날 첫 직장으로의 출근을 하게 되었다.
프롤로그를 포함해 약 10회분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쓰려했던 의도는 20대 초중반부터 겪어온 다양한 면접과 실무이야기(재미 위주)를 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적다 보니 한정 없이 늘어나 빨리 함축하여 적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