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두 명의 마음엔 풀 한 포기 없이 쓸려나간 허망함만이 남았다. 어머니는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라며 앞으로 겪을 무수한 사회생활의 아픔을 먼저 예방주사 맞은 셈 치자고 그렇게 납득시켰다.
나보다도 더 마음 아프실 분이 못난 아들 위로해 주신다며 여러 가지 말들을 해주신다.
한참을 듣다 어렵게 마음속 말을 떼어내 건넸다.
"나는 괜찮은데. 엄마는..."
나보다도 속상할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잘 알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어머니는 목이 메는 듯 말을 쉬이 하지 못했다.
"네가 잘 풀리고 좋은 곳 취업하고.. 결혼 잘하고 그럼 되는 거야."
가슴속 개울에 살며시 떨어진 걱정의 돌은 큰 울림이 되어 번졌다. 지금껏 놓쳐온 공부들과 망가진 성적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프로가 되기 위해 바친 시간만큼 놓쳐온 많은 것들이 쐐기가 되어 뇌리에 박혔다. 다만 마음이 아프다는 나를 받아들임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저 목표를 잃고 잠깐 구멍이 난 것이지 곧 메워질 것이고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의지와는 달리, 상담 후 의사 선생님은 우울증으로 진단하셨다.
요즘 학생이든 사회인이든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감기라며 가볍게 생각하라 했지만 당시의 나에겐 너무도 가혹한 형벌 같았다.
"저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힘들어요. 목표로 하던 것도 놓치고 잃어서 잠시 방황한 거지 병이 아니에요."
상담과정에서도 몇 차례 나는 정신이 이상하거나 혼란스러운 건 아니라 말했으나 선생님의 판단은 목표를 잃은 것에 따른 마음의 구멍이 너무 깊고 커진 터라 자연적으로 치유되기는 힘들다고 하셨다.
필시 정서적 불안감이나 떨림을 파악하셨을 것 같다. 그렇게 약물치료를 권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나로선 너무 괴로웠다.
그렇게 타오르던 열정의 결과가 마음의 병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전력질주하는 달리기 선수가 사실 무릎 관절염에 걸렸다는 것과 다른 게 무엇인가. 지금껏 내가 쉬지 않고 달려온 러닝타임은 한낱 주마등이 되어 허망하게 결승점을 비출 뿐이었다.
일정기간 약을 복용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처음엔 개수도 참 많았다.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박힌 장기이길래 이렇게까지 많이도 먹어야 하는 건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주홍글씨처럼 평생 따라붙을 것만 같았다. 이 약을 먹는다고 지금의 내 마음은 평온함을 찾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도 했다.
공격성도 없는 무기력 한 좀비처럼 집에 널브러져 있었음에도 외부의 시선이 걱정되거나 신경 쓰였다.
'정신병'이란 단어로 치부해 버리면 마치 '어디 고장 난 사람으로 취급할까?' 하는 물음표는 계속 이어졌다.
약은 한 동안 활동을 저지시켰고, 날 무능하게 만들었다. 우울감을 없애 준 대신, 다른 감정도 함께 절제시켰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희로애락 중 애를 떨쳐내길 바랐지만, 마치 부분틀니를 끼우는 것처럼 나머지 감정의 이빨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기분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그러한 좀비생활은 50kg대를 유지하던 내 몸무게를 폭풍같이 성장시켜 60kg대로 진입시켰고 학창 시절 내내 깡마른 나는 처음으로 뱃살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엔 몽롱하던 정신은 약이 익숙해짐에 따라 점점 맑고 또렷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우울감은 잦아들고 세로토닌이 자리를 채워나가며 행복 또한 다시금 증폭되고 있었다.
다만 게임에는 더 이상 어떠한 목표나 꿈을 두지 않았고 내가 찾아나가야 할 길만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게임중독과는 다르게 그저 게임의 목적이 꿈이자 목표였기에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자 비로소 취미로써의 그림만 보였다.
어렵게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약 34일간의 병가를 마무리 짓고 다시 학교에 돌아왔을 땐 관심학생이 되어있었다. 뭔가 학우들이 나를 대할 때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이 들어 불현듯 환자취급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3주간 주번을 했던 봉두도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있었고 반가워하는 한편으로 몸 여기저기 쓱쓱 눈으로 훑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어느 순간 다들 철이 가득 든 3학년이 되어있어서 위화감이 스며들었다. 신기함과 동시에 나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학교라는 곳에서 이런 느낌이 들 거란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기에 한동안은 소름이 돋는 팔을 수시로 문지르며 지냈다.
취업이라는 단어가 코앞까지 성큼 다가설 무렵부터 난 공부에 매진했다. 조금이라도 뒤처진 것을 따라잡기 위해 억지로 머리에 구겨 넣었지만 단 하나, 포기했던 수학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루트를 배울 무렵 잠깐 눈을 감고 떴을 때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때 놓쳤던 루트는 허망하게 떠난 여자친구와 같았다. 그때 따라가지 못한 수학의 진도는 땅끝마을처럼 멀어져 있었기에 지금도 수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조금 이어나갔지만 응용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숫자만 보면 어지럼증을 느꼈으니 대한민국의 수많은 수포자들은 숫자 앞에서 나처럼 어지럼증이나 현기증 따위를 느끼리라. 나는 수면을 핑계로 수학을 게을리했지만 사실 숫자 몇 개를 두고 씨름하는 그 과목이 유독 괴로웠다. 국어는 매우 재밌었지만 말이다.
모쪼록 3학년 1학기엔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게 되었고 2학기에 접어들었다. 공업고등학교의 특징 중 하나는 2학기부터 본격적인 취업시즌이 된다는 것이다.
우수한 몇몇의 친구들은 이 악물고 공부를 해 수능을 치고 조금 더 나은 대학을 가기도 했고 아예 공부와 담을 쌓은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 전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가 다음 해 2~3월 즈음 졸업식에 얼굴만 쓱 비추는 친구도 있었다. 물론 적당히 부유해진 주머니를 한껏 뽐내기도 했으니 조기취업은 충분한 자랑거리다.
나는 그런저런 친구도 아니어서 고민만 하고 있었다. 수능을 보는 친구들을 제외하고 남은 성적 좋은 애들은 각 대기업에서 추려가곤 했다. 반도체기업, 가전기업, 빵기업 등등.. 그렇게 내 친구들 하나 둘 모두 대기업으로 빨려 들어갔고 2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 아직도 그 기업에 다니는 친구도 있을 정도니 감히 황금동아줄 아니겠는가.
앞서 서술했듯 공부와 담을 쌓고 기업과도 인연이 없던 나는 취업을 고민하던 찰나 담임선생님의 조언으로 전문대학이라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당시 나는 300만 원을 넘어가는 매 학비가 너무 부담스러웠던 것도 대학을 거부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부모님께 내내 마음에 걸려있던 내 건강문제로 인해 금전적인 부분에서만큼은 해를 끼치지 않으려 했다.고민 끝에 포기하려던 찰나 저렴한 학비에 장학금도 지원이 가능하다고 하는 모 전문대학을 소개받게 되었고, 나는 '인터넷미디어'학과 1학년으로 새롭게 도전을 시작했다. 컴퓨터를 놓지 못하는 내 알량한 자존심이 선택한 학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