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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렌즈 Sep 29. 2024

랭커에서 환자가 되기까지

엄마, 나 면접 다녀올게 #7


┃어설픈 재능일까, 운이 없었을까┃



1998년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된 지 약 4년 뒤 2002년. 워크래프트3가 출시되었다. 3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처럼 이미 워크래프트 1,2로 굳건히 다져진 팬층까지 합쳐지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사했다.



PC방에 막 워크래프트3가 출시되었다는 말에 나는 서둘러 친구들과 함께 게임에 접속했고 금세 흠뻑 빠져들었다. 스타크래프트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적당한 템포에 수준도 높았고 딱 내가 하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고수들의 영상을 보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찍어놓은 스크린샷

어느 시점쯤 되자 포트리스2처럼 상위랭커로 발돋움했고, 그 해 고등학교 2학년 기말고사를 망칠 때쯤 되어서야 내 게임랭킹은 2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겜돌이들끼리 소문이 나서인지, 다른 반에 있는 워크래프트3 고수 친구가 찾아왔다. 열심히 해서 같이 대회를 나가보잔 것이었다.



비록 같은 PC방을 가진 않았지만 같은 꿈을 꾸며 그렇게 공부보다는 게임을 택했고 나는 밥도 걸러가며 친구들과 PC방, 집에 오면 컴퓨터 앞에 앉아 늦은 시간까지 게임에 몰두했다. 엄마가 차려준 식사도 대강 먹어가며 했다.



그 당시 나는 제법 유명한 놈이었다. 내 닉네임을 구글에 입력하면 다양한 영상들이 나왔고 친구가 만들어준 내 팬카페 회원수만 500명에 이르렀기에 당시 '인방'시스템이 있었다면 나도 제법 시청자를 끌어모을만한 재능은 있었다.



중국 프로선수와 매칭이 된 적도 있었고 어렵게 승리해 당시 UCC에 내 플레이가 박제되기도 했다. 그러한 기쁨도 누리며 승부욕은 더욱 강해졌다. 이때쯤 어떤 클랜을 가입하게 되었다.



포트리스2때의 안 좋은 기억이 있어 가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침 TV에선 클랜대항전 워크래프트3 대회가 시작되려는 찰나여서 난 상위랭커로 꾸려진 클랜을 가입하게 됐고 첫 대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5판 3선승 예선을 준비하며 나는 마지막 주자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열심히 클랜원들을 응원했고 그들은 나보다 실력이 뛰어났기에 충분히 내 차례까지 오리라 생각했다. 아니, 오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면 그 또한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TV에 나올 우리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마지막 2:2에서 내가 조커카드로 등장해 승리의 쾌거를 안겨 줄 수 있다 생각했다. 적어도 3:0으로 철저하게 짓밟히기 전 까지는 말이다.



반면에 같이 대회를 나가보자며 얘기하던 친구는 다른 클랜소속으로 대회에 진출하게 되었고 TV를 통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너무 부러웠고 욕심이 났다.



타오르는 열등감은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난 더욱 매진했고 더더욱 미친 듯이 게임을 돌렸다. 학교에 있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오로지 게임만 해댔다. 그럴수록 내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 가는 듯했다.



패배의 원인이 온전히 나에게 몰리는 게임 특성상 스트레스는 점점 심해졌다. 상위랭커를 유지하려면 이길 때마다 10점 오르고 지면 30점이 깎이는 불합리한 시스템을 견뎌야 했다. 부담감은 더 커져갔다. 고등학생이 감내하기엔 그리 쉽지 않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롤은 5:5 게임이다. 적어도 나와 함께 뜻을 같이하는 팀원이 4명은 더 있다는 뜻이고, 패배에 따른 스트레스를 적어도 '남 탓'을 해서 고통을 그나마 나눠가진다. 하지만 워크래프트3 같은 RTS(실시간 전략 게임-Real-Time Strategy) 장르는 달랐다. 온전히 내 탓 내 잘못이었다.



대전을 하며 어느 순간부턴 과도한 긴장 탓에 손과 다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승부욕이 강한 나로선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한참 동안 진정이 되지 않는 등의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차라리 팀 게임이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다시 두 번째 클랜대항전 준비를 하려는 찰나. 클랜장은 클랜을 그만두겠다며 돌연 해체를 선언해버렸다. 클랜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허탈했다.


꿈이 무너지는. 아니 꿈이 사라지는 느낌이었고 충격은 강하게 머리를 때려댔다.



꿈이 점점 멀어지는 감정을 느끼며 목표를 잃었다. 랭킹이라도 유지하려다 점점 더 떨어졌다. 이제 첫 페이지에선 내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모니터 속 내 게임 유닛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을 걸 때마다 심하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원래의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누며 고민이라던지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대회준비로 인해 잔뜩 예민해진 나를 위해 최대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지만 자주 신경질을 내는 상황을 어머니는 안타까워하곤 했다. 그래도 못난 자식 꿈을 향해 달려 나간다고 응원도 해주었건만.



게임을 이겨도 석연치 않은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게임을 했다. 내 플레이는 점점 둔해졌다. 게임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질 때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점점 한판 한판 중압감이 크게 느껴졌다. 이게 슬럼프일까. 아니겠지. 아니야.


마우스 클릭 한 번에 두려움이 담겨있었고 키보드 클릭 한 번에 실패로 인한 부담감이 담겨 있었다. 딸깍 소리가 날 때마다 머릿속을 누군가가 헤집어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딸깍' 잘하고 있어.


'딸깍' 아직 충분해 준비만 잘하면 돼.


'딸깍' 이상하다. 이전처럼 자신감이 없어.


'딸깍' 왜 이러지.


'딸...깍'



엄마.




'쿵!'




큰 소리에 놀란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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