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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렌즈 Oct 12. 2024

첫 면접 첫 직장 그리고 반전

엄마, 나 면접 다녀올게 #11


┃이건 아닌 거 같아. 때려치울까?┃




2005년 11월 28일 첫 출근날부터 오실장은 뒤통수를 때렸다.



그는 자칫 부탁의 태도가 거만해 보일까 싶어 허리를 적당히 앞으로 숙여 깍지 낀 두 손을 오른쪽 무릎에 포개놓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함과 더불어 협조를 바라는 포즈를 취간절함을 담으면 좀 더 진정성이 전해질까 싶어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말했다면 아마 내가 뒤도 안 돌아보고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를 선언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조심스레 말을 꺼내놓았다.



"12월 초부터 야간근무를 해 줄 수 있겠니?"



분명 면접 때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근로시간은 오전 8시부터 점심시간 1시간을 포함하여 오후 5시 퇴근이었다.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내 대답에 오실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두어 번 끄덕거림과 미안함의 어깨 토닥거림으로 그 얼토당토않은 근로방식 변화를 고작 2분여 남짓 짧은 대화로 마무리 지었다.



오전 8시가 아닌. 밤 10시부터 야식시간 1시간을 포함한 오전 7시까지의 근무를 요청한 것이다.



내가 하던 일은 '스캔'이었다. 지금까지 배워온 공부와 다소 달랐지만 결은 비슷한 컴퓨터. 아니 '맥킨토시'를 활용하다 보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런 애매한 상황이었다.


열 줄의 설명보다 나은 한 장의 사진(드럼스캐너)


모쪼록 나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부모님께 고했고 이건 아니지 않나 명백한 사기라며 때려치우겠노라 말했지만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해봐. 1년은 하고 생각해 보자."



가끔 이 날의 결정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있다. 첫 경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사회생활을 여러 차례 거친 뒤에야 깨달았기도 해서이지만,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 하나만으로 판단이 흐려진 게 컸다. 어쩌면 재밌어 보이기도 했었고 말이다.



출근하겠노라 말씀드리고 일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고해상도 드럼스캐너는 4절지에 다량의 사진을 차곡차곡 붙인 후 그 위에 얇은 필름을 얹어 원통형 스캐너에 테이프를 발라 단단히 고정시킨다.


약 8분~10분간의 빠른 회전 후 스캔이 다 되고 나면 모니터에 아주 어마어마한 고해상도 사진이 모니터를 가득 채운다. 어느 정도냐면 먼지나 코딱지 같은 것도 모니터의 1/4를 차지할 수 있단 것이다.



내가 왜 야간근무를 해야 되는지 알 수 있었던 시기는 출근 후 3일쯤 되서였다. 인쇄업종.. 그러니까 내가 속한 부서는 '졸업앨범'제작 회사였다.


편집팀 스캔팀이 가장 바빴는데 내가 속한 스캔팀은 일 자체는 그저 스캔되어 나오는 파일이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여(파일 여는데만 2분 이상 걸렸다) 잘 저장 후 편집팀에 전달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오류 없이 4대를 계속적으로 돌려야 하는 반 노가다성 업무인 데다 혼자서 하기엔 벅찼던 터라 야간근무자가 더 필요했던 상황이고, 밤 낮 없이 2인 2조로 거진 20시간을 돌려야 물량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전국으로 졸업앨범 단가를 맞추기 위해 다양한 사진사, 영업쟁이(보따리상)들이 방문해 계약이 되면 자기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4절지 스캔본 수백 장을 맡겨놓고 갔던 것이다.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검사, 판사분들의 책상에 서류가 퍽 하고 얹어지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딱 그 정도의 양이 내가 당시 돌리던 스캔의 양이었다.


이게 자네가 스캔을 돌려야 될 양이란다.



아무튼 그 당시는 디지털카메라. 그러니까 DSLR보다는 필름카메라가 더 선호도가 높던 시대라서 당연하게도 고해상도 스캔을 보유한 회사가 몇 없었기에 전국의 사진사들이 다 몰려들었다.


DSLR이 보급됨에 따라 점차 업무량이 줄더라도 이 '인쇄'업종의 보수적인 특성상 큰 변화가 오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심지어 장사도 무진장 잘 됐다.



처음엔 '수면장애'를 걱정했다. 이미 불면증을 심하게 겪어본 경험이 있는지라 이에 따른 두려움이 있었지만 하루 이틀 하다 보니 금세 몸이 적응했고 또 주마다 바뀌는 게 아닌 2~3개월간 꾸준하게 야간만 하는 것이다 보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맘때쯤 싸이월드에 포도알 쌓기용 감성 다이어리도 참 많이 적었다. 새벽녘엔 어찌나 감성적이 되던지..



그렇게 무난한 야간근무가 끝난 후 여름쯤 됐을 무렵 오실장은 나에게 저축을 하느냐 물었고 나는 생활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을 어머니께 드린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호통을 치더니 지금부터 직접 통장을 관리하라며 부모님이 의지를 꺾으라 한다. 남의 가정사에 왜 간섭인가 싶어 처음엔 굉장히 불쾌했다.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으려 했으나 매일 아침마다 "이제 네가 관리하니?"라는 물음을 계속 던지니 결국 부모님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정 안되면 직접 전화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다 큰 성인이 왜 부모님에게 니 인생을 맡기냐며 저축은 인생의 기반을 다지는 수단이라 단호하게 얘기하셨다.



어머니께 어렵게나마 이러한 일이 있음을 얘기했고 처음엔 강하게 반대하던 어머니도 상사의 고집에 결국 뜻을 굽히셨다.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시어 달마다 40만 원의 저축을 시작했다. 첫해 고작 월급 90만 원인 나였는데 말이다.



사회생활이 3년에 접어들 무렵 통장엔 약 1400만 원 정도가 모였다. 일도 많이 익숙해졌지만 3년이란 세월 동안 내가 하던 업무는 능숙해지는 것과 반대로 굉장히 줄어있었다.


결국 야간근무도 1개월로 줄어들고, 스캔은 2명이 돌려도 충분한 시기가 되어버리다 보니 현장으로 종종 지원을 나가곤 했다.



이 또한 굉장히 부당한 대우임에도 '좋소'인걸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익어가는지도 모른 채 첫 직장을 덤덤히 보내고 있었다. 생산 쪽에 배치되어 아르바이트생들을 알려주고 늦은 시간까지 야근도 해가며 사무직과 현장직의 다양한 맛(?)을 경험했다.



등유난로 옆에서 쪽잠을 자다 입이 살짝 돌아간 경험도 고, 납기가 늦어진다며 신나통을 들고 와 바닥에 뿌리며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에 경찰을 부른 적도 있으며, 철야 근무 이후에 사우나에 갔다가 그대로 몇 시간을 내리 기절하듯 잠든 적도 있었다.


그때쯤 서둘러 발을 빼고 더 나은 곳을 찾아보라는 친형의 조언조차 좋은 사람들과 편하게 일하고 있단 생각에 고민조차 하지 않고 거절했다.



출근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습관처럼 되기 시작했지만 회사는 많이 변해갔다. DSLR이 본격적으로 먹히기 시작하면서 산업의 변화는 빠르게 찾아왔다. 교문앞에서 사진을 찍어주며 서성이던 사진사는 사라졌고 '사진인화'보다는 DSLR을 통해 디지털로 사진을 담는것이 더 고화질이며, 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우리회사는 이사도 진행하며 규모는 축소됐고 사업자도 두 번이나 바뀌면서 퇴직금도 중도정산 되어버렸다.


직장을 옮긴 것도 아닌데 옮겨진 것처럼...


이후 나는 2년 차쯤 되어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라는 오실장의 조언에 따라 주간업무 위주로 진행하는 '편집팀'에 소속되었다. 두 가지 부서에 소속되어 일하는 건 참 괴로웠지만 이때 배운 포토샵은 아직도 활용하고 있으니 인생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박물관에서 오는 다양한 유물들을 '누끼(배경과 피사체를 분리하는 작업)'따는 것부터 해서 전단지와 명함도 만들곤 했다.



오실장은 나에게 있어 은인이다. 비록 좋소에서 만나 서로의 성장은 미비했지만 마치 미생의 오 과장처럼 나에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건네며 나를 '성인'으로써 성장시켜 주었다.


그때쯤 철도 많이 들었고 일이 익숙해지는 3년 차를 넘어 4년 차가 접어들 무렵 또 오실장은 나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이제 일도 많이 줄었고
여기저기 소속돼서 고생하지 말고
이참에 촬영을 배워보는 게 어떻겠니?
갈 곳은 내가 미리 말해놓았다.
파견으로 다녀오면 돼.



처음 나에게 야간근무를 해줄 수 있겠나 물었던 그때의 부탁이 아닌, 이젠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회사는 어려웠고 본인은 여기서 사회생활을 마무리 짓겠지만 너는 아직 젊으니 더 도전해 보란 것이었다. 퇴사 후 이직이 아닌 파견이라는 접근으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사진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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