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두민 Aug 08. 2023

문뜩 다가온 아름다움

내 인생의 데이터 베이스

 최근에, 퇴직 후 영화를 주기적으로 보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넷플릭스를 통해서든 영화관에서 직접 보든 간에 예술을 통해서 나를 잊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제껏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나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포섭하고 동일화시켰다. 현상학자로 매우 유명한 후설은 자신의 철학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원본적이며', '내실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의 저서 논리연구나 이념들에서는 기호를 가지고 표현과 표시를 구분하여 '포네'의 전통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철학을 면밀히 살펴보면 단순히 본질이 있다고 상정하고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에 대한 제거를 요청한다. 즉,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자기는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데리다는 그의 철학에서 본래 선입견 제거를 요청했지만, 사실은 후설만의 섭인견을 요청함으로 현전의 형이상학을 완성시켰다는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런 상황을 보고 환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본질을 찾아내려는 모든 사람들은 '은밀한 본질주의'자로서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그 본질은 권태를 맞이하고 만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자기 동일적 전체성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무한성을 이야기한다. 그는 '타자 속에서 자기 동일적 물음'을 던짐으로써 전체성의 폭력을 고발한다.


 내가 전체성의 폭력에 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일반화의 오류' 같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권태롭다는 것이다. 무엇을 봐도 나의 주체성으로 다 포섭하기에 감정의 변화나 어떠한 자극도 수용하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 그저, 멍하니 있게 된다. 그러나, 나 이외의 타자를 향유하면서 나를 잊어간다. 나를 잊어간다는 것은 그것과의 얼굴을 환대하는 과정이고 권태로운 자아에서 벗어나 황홀한 또는 무한한 타자 속으로 내가 유입이 된다. 이렇게 유입된 경험은 굉장히 낯설다. 나를 잊는 몰입의 순간이 나를 집어삼킬 때는 무아이지만, 그 후에는 내게 없을 것 같았던 감정들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이번에 보게 된 엘리멘탈이 그렇다. 엘리멘탈이 갖는 어떤 특수한 장치들을 알고 다 만든 것인지는 모르나, 그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고 감동하고 감탄했다. 내게 있어서 기대하지 않았던 애니메이션 영화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나를 잊었다. 마치, 내가 웨이드가 된 것 같았다랄까.. 스토리가, 영상미가, 노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울어도 된다고, 지금까지 강한 척하느라 고생했어"라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냥 울었다. 속상한 것들, 상처받은 것들 등 장면이 지나가고 노래가 지나가면 거기에 실어서 나의 슬픔과 못남을 실어 보냈다.


 해석학자 존 카푸토는 가다머의 말을 빌려서 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에서 미는 일상생활의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름다움이나 감동은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나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나, 눈이 멀었기에 이렇게 가까운 아름다움을 제 기준으로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는지 탄식이 나왔다. 그래서, 내가 느꼈던 것을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서술하고 싶어졌다. 먼저는 엘리멘탈 도입 부분의 '칼의 데이트'에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성장의 욕망이 만든 독서의 '환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