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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민 Aug 15. 2023

'내려놓음'도 하나의 선입견이다

내 인생의 데이터 베이스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주위에서 많이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내려놓음'에 관한 것이다. 아무래도,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하는 나를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들을 들으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보다 종교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내려놓음'이란 것에 대해서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갖기를 원한다. 마치, '내려놓음'속에 진리라도 있듯이 말이다. 앞서 말하지만 이것은 특정한 종교를 염두한 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표현적으로 종교를 사고하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이들의 질문에 나의 대답은 욕망해도 된다고 대답한다. 욕망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건강한 것이라고 본다. 건강하다는 것은 삶에 생기 및 활기를 가져다준다. 자신 스스로 동기부여도 할 수 있으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연속적인 목표를 부여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욕망함'이 불경하다고 치부된다. 내가 말한 무엇이든 욕망해도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이기적이게 갖겠다는 철없는 생각이 아니다. 사람은 세계-내-존재 안에서 피투 된 존재자이기에 사회의 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법을 잘 지키면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며 욕망하는 것이지 근대의 순수이성처럼 자신만이 독립된 주체로서 모든 것을 자기 동일화시키면서 합리화하는 것은 현대의 시선으로 볼 때는 유아적인 행동이 아니다. 여하튼,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불경하다고만 보지 말자. 


그렇다면, 욕망을 제거하고 거세시키는 '내려놓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욕망해도 된다는 것처럼 하나의 선입견일 뿐이다. 물론, 사람은 각자 다 다른 선입견들로 살아가기에 나쁜 의미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려놓음이 마치 이상적이고, 본질적이며, 최고의 지향의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항 대립에서 벗어나 살아가긴 하지만, 대부분은 이항 대립적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어려워한다. 심지어, 자신이 이항 대립적 사고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음이 넓고 인자하며 세상의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우친 '위대한' 성인으로 인식하며 남보다 우월한 의식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우월한 의식은 다른 사람과 나와의 신분의 차이를 생성하고 계급적 구별도 서슴지 않다. 물론, 니체가 지적했듯이 선악의 기준은 시대마다 달라지며, 도리어 선악을 만드는 체계 밑에는 '힘에 의지' 또는 '자기 보존의 능력'을 밑바탕 삼아 권력을 갖고 싶어 한다고 지적한다. 즉 이항 대립은 내게 있어서 다른 사람과 구별 짓고 더 나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의식 체계이다. 여기서 내려놓음도 마찬가지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신 앞에 또는 지혜 앞에 내려놓고 마음을 비움으로써 대단한 사람 또는 진리를 깨우친 사람으로 비추어지길 은밀하게 원한다. 그러면서, 그런 '진리'를 모르는 사람과 비교하며 나와 그 사람을 은밀하게 구분 짓고 자신이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치부한다. 나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나도 공부를 하고 있으니 인문학적 용어들을 써가면서 은밀하게 선을 만들어 마음속으로 독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나누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려놓음'이나 '풀소유'에 대한 하나의 선입견 또는 환상을 고발하면서 나름 위로하는 것 같아 기분은 좋다. 그러니, '내려놓음'이나 '풀소유'를 지향하는 의식이 최고라고 스스로 속이는 행위를 멈추고, 자신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마주하고, 양심이 무엇이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지 사유해 보고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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