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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민 Aug 15. 2023

자유의 이면

내 인생의 데이터 베이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언어의 체계 안으로 들어와 살아간다. 언어는 하나의 그물망 또는 체계 안에서 서로의 단어들이 연결되어 의미를 만들어 간다. 만일, 단어 하나만의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면 말을 뱉는 순간 그 의미는 휘발유처럼 날아가버릴 것이다. 그만큼 말하는 것에 대한 의미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에 대한 맥락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맥락이 없어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발화'하는 것이다. 발화는 단어들을 입에 실어서 옮기는 전달자의 역할을 한다. 그 전달자의 역할은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의미든지 상관없이 말은 발성기관을 거쳐 발화된다. 그리고, 청자는 발화자의 말을 듣고 그 의미에 대한 사후효과를 발생시킨다. 이처럼, '발화'하는 것만큼 자유로운 것은 없다. 최소한, '발화'는 자유롭다. 특정한 규칙에 얽매이지도 않고 그저 말을 실어 나르면 자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이다. 그러나, 발화된 말의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어떨까? 과연, 발화는 자유로운 것일까? 아니면 의미를 지향하는 인간의 내실적 체험을 언어에 실어서 보내는 과정 중에 오류를 일으키는 방해자인가? 


'말은 참 쉽다'라는 표현이 문뜩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어려운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또는 실천이 뒤 따르지 않는 사람을 보고 보통 '말은 참 쉽게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만 보아도, 소리를 끄집어내어 발화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그저, 발성기관의 도움을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내-존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말은 결코 쉬운 것도 아니고, 대화 또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본질적으로 경험하면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청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 순간 청자 자신의 제멋대로인 해석을 발화자는 감내해야 한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연인과 싸울 때 아무리 대화를 하려고 해도 서로가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상황을 생각해 보라! 서로, 다른 부분을 보고 이해하고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을 이미지로 상상할 것이다. 그렇기에, 발화자는 자신의 의미에 충분한 책임을 지니고 있어야만 말을 하고 그에 대한 사후효과를 감내할 수 있다. 즉, 발화되는 순간 잘못 이해될 각오를 하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유롭다.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자유롭다. 그런데, 그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유를 가장한 폭력으로서 상대방에게 정신적 가해를 할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다. 세인의 삶을 살아가던, 본래적으로 삶을 살아가든 간에 말을 하는 것에 대한 자유 그리고 그 이면에는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투명하게 안고 가는 사람들이 '말'에 대한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흘린 붉은 책임 위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세상이 내 멋대로 된다고 하는 자유가 아니더라도, 내가 오늘 집중할 수 있고, 변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으며 나의 감정에 직면하며 솔직해질 수 있는 그리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꿈을 꾸면서 준비할 수 있는(모두가 다 꿈을 이루진 않더라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어떤 이면을 갖고 있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유의 이면에는 언제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상관없이 누군가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선택의 자유를 갖는 시민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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