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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닭꼬치

8. 서울역 호수집

by 간장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 데미안 中


"닭꼬치 먹으러 갈까?"


아버지는 편식가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부르신다. 입맛이 까다롭다는 걸 본인이 인정하시는 거다. 지난 세월, 어머니가 하셨을 고생이 새삼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소위 불량식품을 싫어하셨다. 질 나쁜 식재료로 만들어진 공장음식으로 명명하셨다. 신선하지 않음을 자극적인 양념으로 숨겨넘긴다며, 그런 음식을 만드는 것은 못된 짓이라고 열변을 토하셨다.


그래서 놀랐다. 닭꼬치를 먹으러 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말이다.


닭꼬치야말로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불량식품에 정확히 부합하는 음식이었다. 원산지는 커녕 도축한지 얼마나 됐는지도 알 수 없는 고기, 짜고 달고 화학 조미료가 범벅된 짙은 고동색의 데리야끼 소스. 이걸 아버지가 드신다고? 심지어 아들에게 같이 먹으러 가자 하신다고?


표정에 의아함이 드러났는지, 아버지가 날 보며 슬쩍 웃으셨다.



애당초 닭꼬치라 함은 길거리에서 먹는 음식 아닌가. 군데 군데 검은 때가 낀 트럭에서 구워 파는 음식. 시장 어귀에서 소스를 듬뿍 바른 채 쌓아두는 음식. 초등학교 앞 분식점에서 인도로 나있는 창을 활짝 열어둔 채 일부러 냄새를 풍기며 만들어내는 음식. 그리하여 한 손에 기다란 나무꼬치를 들고 발걸음 보다 더 재게 입을 놀려가며 먹어대는 길거리 음식. 그게 본래 닭꼬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였다.


그런데 아버지를 쫓아간 곳은 보통 음식점이었다. 트럭도 분식점도 아니었다. 호수집. 주황색 간판에 촌스러운 글씨로 적힌 세 글자. 마포 최대포집처럼 오래된 고기집이 생각나는 집이었다. 세월이 아로새겨진 좁은 입구 앞에서는 작고 늙은 아저씨가 소매 없는 란닝구를 입은 채 희뿌연 연기가 나도록 연신 불을 피워대고 있었다.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다. 네댓개쯤 되는 테이블들이 좁게 붙어 있었다. 그다지 쾌적하지 않은 환경이 여느 노포와 같았다. 운영 방식도 참으로 불친절했다. 하루에 파는 닭꼬치 총량이 정해져 있었는데, 애초에 그 양이 많지 않아서 저녁에 가면 닭꼬치를 주문할 수조차 없었다. 그마저도 1인 2꼬치 제한까지 있어서 양껏 먹을 수도 없었다. 맛보기 수준의 감질나는 양이었다. 저렴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길에서 사먹는 닭꼬치와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편한 집이 맛집이라는 게 의아했다. 줄 서서 먹는 집이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개 닭꼬치는 순살이다. 뼈를 제거한 넓적다리 부위 살코기를 기다란 꼬치에 줄줄이 꿰어 굽는다. 그리고는 길거리 음식들이 으레 그렇듯 양념이 한껏 얹어진다. 비린내를 잡고 맛을 더하기 위해 고기 자체에도 이미 많은 작업을 해놨겠지만, 뚝뚝 떨어질만큼 잔뜩 바른 양념 위에 다시 또 양념을 덧발라가며 굽는 모습이 아무래도 닭꼬치하면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헐?


테이블에 호수집 닭꼬치가 서빙되는 순간. 그래서 그 집 닭꼬치를 처음 본 순간. '헐'이라는 감탄사가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그것은 그동안 먹어왔던 닭꼬치가 아니었다. 말그대로 진짜 '닭꼬치'였다.


긴 나무 꼬챙이로 닭을 꿰어 익힌 건 똑같다. 그렇지만 순살이 아니다. 닭을 뼈채로 도리내어 그 부위를 그대로 꽂은 채 익힌거다. 별다른 소스도 없었다. 그제서야 가게 앞 아저씨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연신 연탄불 앞에 앉아있나 했더니, 불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닭꼬치를 굽는 거였다. 덕지덕지 소스를 바르는 모습을 못 봐서, 닭꼬치를 굽는 건지 알아채지 못한 거다.


충격이었다. 이런 닭꼬치가 있을 수 있다는 건 평생 생각하지 못했다. 듣고 보기는 커녕 공상조차 못 했다. 끽해야 데리야끼 소스니 매운 소스니 따위로 닭꼬치를 구분해왔었지, 뼈 있는 닭꼬치와 순살 닭꼬치로 구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 전에 알던 닭꼬치는 '닭꼬치'가 아니었다. 좋게 말해봤자 '닭꼬치 중 하나'였고, 심하게 말하면 '가짜 닭꼬치'였다.



그래, 이게 '진짜 닭꼬치'였다. 순살 닭꼬치라는 게 오랜 옛날에 만들어졌댔어봤자 얼마나 유구한 음식일 수 있겠는가. 단가 때문에라도 브라질산 순살 닭다리살을 사용해야하고, 편리한 음식 제조를 위해 공장에서 만들어낸 소스를 찍어내어 파는 음식이 말이다. 태초에 닭꼬치라는 음식이 처음 생겨날 때에는, 분명 뼈가 있는 채로 별다른 소스 없이 구워졌을 거다. 호수집 닭꼬치 같은, 그래, 이런 모습이었을 거다.


그래서 <데미안>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새, 알, 세계. 알을 하늘인 줄 알고 알 속에서 살아왔는데, 알이라는 세계가 붕괴되어 진짜 하늘을 처음 본 기분이었다. 닭꼬치집에서 닭꼬치를 먹었을 뿐인데, 하늘을 본 거다. 우습게도 거창하다.


일생토록 호수집 닭꼬치만 먹어본 친구와 길거리 순살 데리야끼 닭꼬치만 먹어본 친구가 닭꼬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서로 말이나 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거다.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다. 서로가 믿고 있는 닭꼬치가 있는데, 상대가 얘기하는 게 귀에 들리기 만무하다. 각자 스스로가 맞다고만 우길 거다. 본인들의 알에 갇혀 하늘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사실은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는데.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닭꼬치를 먹을 거다. 각자의 닭꼬치가 머릿속에 굳건할 거다. 종교가 될 수도 있고, 정치가 될 수도 있고, 철학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하다못해 시간조차 유한하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닭꼬치들을 다 먹어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불가능하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건 '인정'이다. 내가 먹은 닭꼬치가 이 세상의 모든 닭꼬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거다. 듣고 보지 못한, 감히 상상하지 못한 닭꼬치일지라도, 세상 어딘가 떡하니 존재할 수 있다. 그 세상에서는 그게 '진짜 닭꼬치'일 수도 있다. 다른 닭꼬치의 가능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누군가와 닭꼬치에 대해 반목없이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가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아버지가 데려가주신 호수집 닭꼬치 덕에 작고 좁은 알이 깨졌다. 운이 좋았다. 우연찮은 기회에, 투쟁도 고통도 없이 알이 깨졌다.


얻어 걸렸다.



나이를 먹어가며 고집이 생긴다. 내 말만이 맞는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러나 싶기도 하다. 오랫동안 젓지 않아 굳어버린 페인트처럼, 마음 역시 꾸덕하게 굳어가는 기분이다.


그럴 때마다 호수집 닭꼬치를 다시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게 틀렸고, 저 사람의 말이 맞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마음수련이 한참은 덜 된 나에게, 호수집 닭꼬치는 자칫 굳어가는 마음을 저어주는 막대 같은 존재다. 다시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유화제다.


의외로 많은 싸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서로의 닭꼬치가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무지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다툼이 시작될 것 같을 때, 속으로 한번만 되뇌여보면 좋겠다.


맞다, 닭꼬치!


꽤 효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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