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7.
오늘은 오랜만에 친가 식구들이 모두 모여 밥을 먹었어.
네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그리고 증조할머니. 엄마 아빠까지 모두 여섯 명이 함께 했는데, 다가올 아빠 생일을 미리 축하하는 자리였단다.
증조할머니는 아흔이 넘으셨어. 연세에 비해 누구보다 정정하셨던 분인데, 몇 달 전 길에서 넘어지신 뒤로는 기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셨어. 어렴풋하던 치매 기운도 이제는 주변에서 알아차릴 만큼 짙어졌어. 총기가 가득하던 눈빛이 퀭, 하게 흐려지신 걸 볼 때면 아빠 마음이 덜컥 내려앉곤 해.
치매라는 건 소중했던 순간들을 하나 둘씩 버려야 하는 병이야. 과거를 차츰 지우다가, 결국에는 현재까지 잊어버리고 말지.
오복아, 증조할머니는 네가 세상에 나오면 아빠가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은 분이란다. 할머니의 병이 지금이라는 순간까지 덮치기 전에, 당신의 또다른 자손을 어서 보여드리고 싶어.
아빠는 증조할머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단다. 한 지붕 아래서 산 걸 넘어서 아예 둘이 같이 방을 썼어. 그 시간만 해도 반 십 년은 족히 될 거야. 그 시간의 깊이로만 따지면, 어쩌면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보다도 아빠와 더 애틋한 사이인지도 모르겠네.
오복아, 아빠가 너를 증조할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어하는 것 이상으로, 증조할머니도 너를 많이 기다리고 계신단다.
기억이 드문드문 흐려지는 와중에도, 아빠를 볼 때면 잊지 않고 물어보신단다. 갸 밥은 잘 먹냐? 라고. 엄마 뱃속에 오복이가 있다는 기억을 꼭 붙들어매시고, 손주며느리 상태를 살피시는 거야. 잘 먹노라 대답하면,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끄덕이며, 그려, 밥 잘 먹으면 됐다, 그게 최고 중요한 것이여, 하셔.
지난달이었을 거야. 무언가 굉장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할머니가 목소리를 낮춰 아빠를 부르셨어. 아빠는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지.
"할머니가... 포대기 하나 사주고 싶다."
아빠는 순간 멍해졌어.
포대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거든.
요즘 포대기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엄마 아빠 어렸을 때는 포대기에 업혀 컸다지만, 언젠가부터 그렇게 애를 키우면 다리가 휜다는 얘기가 돌면서 아기띠나 유모차로 싹 바뀌어 버렸거든. 거리에서 아이를 포대기로 들쳐업은 사람은 이제 정말 찾아보기가 힘들어.
그런데 말야, 생각해보면 증조할머니한테는 아이를 낳으면 포대기가 필요한 게 당연했지 뭐야. 당신도 그렇게 자라셨고, 증조할머니의 엄마도 그렇게 자라셨을 거야. 또 자식들도 그렇게 키워내셨고, 심지어 손자인 아빠까지도 포대기로 업어 키우셨으니까.
그러니까 오복아, 아빠 할머니에게 포대기는 '사랑'이었는지도 몰라. 그 분의 세상에서 아기를 가장 안전하고 따뜻하게 품는 방법은, 누가 뭐래도 등 뒤에 단단히 꼭 붙들어 매는 포대기였던 거지.
"네, 할머니. 잘 쓸게요."
요즘은 그런 거 안 써요, 라는 말을 아빠는 차마 내뱉지 못했어. 그 대신 꼭 잘 쓰겠노라고 얘기했지.
하얀 거짓말을 하면서 아빠는 마음 속 깊이 바랐단다. 너희 증조할머니가 아빠에게 그 포대기를 꼭 사주실 수 있기를. 아빠에게 건넨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실 수 있기를. 직접 시장에 나가 포대기를 고르실 수 있을만큼, 다시 기력을 되찾으시기를.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그 약속을, 아빠는 참 서글프게 바라고 또 바랐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