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6. 임밍아웃

2025. 12. 17.

by 간장밥

오늘은 엄마가 아빠한테 짧은 영상을 하나 보내줬어.


지금 말로는 이걸 숏츠(shorts)라고 하는데, 오복이 세대에는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네. 아무튼 영상 내용은 아내가 남편한테 임신 사실을 처음 알리는, 이른바 '임밍아웃' 장면이었어.


영상은 남편이 현관문을 여는 장면으로 시작해. 현관문에는 "아빠"라는 글씨가 적힌 풍선과 "안녕?"이라는 글씨가 적힌 풍선이 나란히 붙어 있어. 그 가운데에는 아기 모양 풍선이 매달려있었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남편은 곧 아내의 뜻을 알아채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더구나.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그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펑펑. 한참을 울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듯 일어나 "축하해"라고 말하는가 싶더니, 다시 또 털썩 주저앉아 오열해. '이후로도 한참을 더 울었다'며 영상은 끝나고.


엄마는 그 영상을 보면서 자기도 눈물이 나서 끝까지 못 봤대. 마치 영상 속 부부가 된 것처럼 감정이 마구 올라왔대.


스크린샷 2026-01-18 110244.png < 엄마가 아빠에게 보내준 숏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꽤나 회자됐었나봐. 저 벅찬 마음이 네게도 전해지려나. >


오복아, 하지만 아빠는 엄마가 이 영상을 보낸 진짜 의도를 알아. 이건 아빠와 같이 감동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야. '왜 당신은 이때 이렇게 반응하지 못했냐'는 무언의 구박이야. 아빠한테 또다시 한 소리를 하려는 목적이란 말야.


네가 막 엄마 아빠에게 찾아오던 때의 일이야.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침대 위에서 무언가를 쑥 내밀더라고.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분홍색인 플라스틱 막대. 그래, 바로 임신 테스트기였어. 엄마 뱃속에 네가 생겼다면 두 줄을, 아직 그렇지 않다면 한 줄을 그려주는 놈이지.


아빠는 엄마가 건네준 막대를 받아들었어. 막대에는 베이지색 리본이 메어져 있었고, 그 옆으로는 아주 선명한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단다. 두 줄, 그래, 임신을 알린다는 그 두 줄 말이야.


그 순간,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아빠는 이렇게 말했어.


"어? 임테기 했네요?"


눈물 한 방울 없이.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엄마를 빤히 쳐다보면서.


days_16-3_e.png <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하는 아빠의 모습. 엄마는 아빠 몰래 영상 촬영을 다 준비해두었어. 아주 교활하지 않니? >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틈만 나면 아빠한테 뭐라고 한단다. 세상에 임밍아웃 반응이 그게 뭐냐고. 남들은 울고 불고 난리가 나는데, 당신은 AI냐는 둥, 역시 대문자 T라는 둥, 아내한테는 감정이 완전히 메말라있다는 둥.


아빠 몰래 찍은 그 날의 영상은 엄마가 거의 무기처럼 쓰고 있어. 엄마가 아빠랑 무언가를 얘기하다가 전황이 조금이라도 불리해진다 싶으면, 바로 영상을 재생해서 아빠 눈 앞에 턱 갖다대지. 엄마 기준에, 아빠는 거의 원죄를 지은 거야.


오복아, 아빠는 정말이지 억울하다. 장발장도 이거보단 억울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임신 테스트기를 보여준 그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분명히 엄마는 아빠한테 신신당부를 했었어. 만약 테스트기에 두 줄이 뜨더라도, 그건 진짜 임신이 아닐 수 있다고. 그러니까 절대 미리 설레발 치지 말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시험관 시술로 오복이 너와 만났잖아. 이런 경우는 아기가 아기집 밖에 자리를 잡는 경우도 많대. 그래서 병원에서 아기집에 네가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라고 했어. (아기집 밖에 자리한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자랄 수가 없단다. 다음에 찾아올 아이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 슬픈 일이지.)


심지어는 엄마 스스로도 테스트기를 하느니 마느니 고민을 했어. 갈팡질팡하는 엄마에게, 아빠는 우리가 굳이 테스트기를 하지 말고 병원에 바로 가자고 했고 말이지. 괜히 기대했다가 혹시라도 아니면 실망만 더 클 테니까.


그러니까 아빠 머리 속에는 '두 줄 = 임신 성공'이라는 공식이 있을 수가 없었지. 그저, 이제 1단계가 지났구나, 병원에 가서 다음 검사를 받으면 되겠구나, 정도의 생각만 할 수 있었지. 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반갑지 않은 것도 아니고, 고생한 엄마에게 축하하는 마음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고, 만에 하나 병원에서 다른 결과를 볼 수 있으니까 겁이 나서 기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거지.


아빠가 얼마나 억울하겠니. 엄마가 그렇게나 아빠한테 경고해 놓고선, 이제 와서 아빠 반응이 건조했다고 타박을 하니 말이야. 오복이도 아빠 말에 공감이 가지?


days_16-2_e.png < 그렇다고 아빠가 안 좋아한 것도 아니야. 이거 보렴. 아빠는 엄마를 축하하며 이렇게 환하게 웃었단다. >


오복아. 네가 세상에 나와서 말을 배우는 날이 너무 기다려지는구나. 말문이 트이면, 오복이가 아빠 편을 들어줄 테니까. "아빠 말이 맞네요. 엄마가 너무했네요."라고.


그 때가 되면, 아빠의 억울함이 씻은 듯이 풀릴 것 같다.


상상만으로도 지금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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