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0.
오늘은 염색을 했어.
마침 지난번에 사다 두었던 염색약이 있어서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바로 할 수 있었어. 추적추적 비가 내렸는데,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
염색이라는 건 아빠 머리에 색깔을 칠하는 거야. 아빠가 지금보다 많이 젊었을 때는 빨갛게도 하고 노랗게도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새까맣게만 칠하고 있어. 나이를 먹으면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게 하나 둘 늘어가거든.
검정색으로 물들이는 이유는, 이미 아빠 머리가 군데군데 새하얗게 설어서 할아버지 같기 때문이야. 아직 너를 만나지도 못했는데, 벌써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순 없잖니.
TV에서 한 가수 아저씨가 얘기한 일화가 떠올라. 자기는 잠깐 편의점을 갈 때도, 심지어 어디 나가지 않고 집에 있을 때에도 옷을 신경 써서 입는다는 거야. 이유인즉슨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어. 딸이 그랬대. 친구 아빠들은 다들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데, 우리 아빠는 연예인이라 잘 차려입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고.
그래서 아빠도 생각했어. 최소한 네가 친구들에게 아빠를 소개할 때, 창피하게 만들지는 말아야겠다고 말이야.
무엇이 부끄러울지는 모르겠어. 철 지난 옷일 수도 있고, 관리가 안 된 살찐 몸일 수도 있고, 희끗거리는 머리카락일 수도 있고, 변변찮은 벌이 탓에 위축된 어깨일 수도 있겠지.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지날 즈음의 너는 세상 모든 것을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잔뜩 날카로울 텐데. 과연 아빠의 어떤 부분이 네 눈에 거슬릴지, 불룩 나온 엄마 배를 만지며 때 이른 걱정이 든다.
"우리 아빠야"라며 조금은 더 떳떳하게 말할 수 있도록, 적어도 아빠를 숨기고 싶지 않도록, 아빠도 가수 아저씨처럼 노력해 볼게.
아빠는 눈이 많이 나빠. 그래서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는데, 그러면 눈이 작아지면서 한결 못생겨 보여. 그래서 아빠는 결혼한 지 3년 넘은 지금까지도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만날 때면 콘택트렌즈를 끼고 도수가 없는 안경을 쓴단다. 티끌만큼이라도 두 분께 더 잘 보이고 싶어서지. 엄마를 아빠에게 시집보낸 걸 두 분이 후회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 엄마는 이제 식구끼리 뭘 그러냐며 그만하라고 하지만, 어휴, 어떻게 그래. 두 분은 아빠가 평생 잘 보여야 하는 분인데.
그런데 이제 네가 태어나면, 아빠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는 셈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잘 보이고 싶은 VVIP가 생기는 거지.
오복아, 아빠는 네가 아빠를 좋아해 주면 좋겠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아빠가 내 아빠라서 좋다는 말을 네게서 꼭 들었으면 좋겠어. 상상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울렁대네.
아빠가 나름대로 애써볼게. 머리도 단정히 하고, 몸도 탄탄히 하고, 마음도 넓게 쓸게. 최선을 다하고, 남은 건... 하늘이 아니라 우리 오복이에게 맡겨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