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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장밥 Mar 10. 2021

생선 팔던 할머니가 규카츠를 먹던 날

규카츠 : 오사카 모토무라

할머니는 힘이 장사였다. 어지간한 어린애 다리보다 두꺼운 팔뚝엔 단단함이 박혀있었다. 할머니가 힘을 딱 주면 남정네들도 꼼짝을 못 했다. 손자놈은 고등학교를 다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를 팔씨름으로 이겨보지 못 했다.


할머니가 태생부터 힘이 좋았던 건 아니었을 거다. 할머니의 팔뚝을 키운 건 자식놈들이었다. 어려서 죽은 자식을 빼고 헤아려봐도 딸이 여섯에 아들이 하나. 이들을 먹여살리려면 닥치는대로 일을 해야만 했을 거다.


어쩌다가 정착한 일. 생선을 떼다 파는 일이었다. 새벽에 도매시장에 가서 얼음 몇 덩이와 함께 생선을 떼오면, 거기에 몇 푼 덧붙여 파는 걸로 입에 풀칠을 했다. 반 오십 년. 동네 시장의 안방마님이 되도록 할머니는 생선을 팔았다.


생선 대가리를 잘라낼수록, 할머니의 팔뚝은 두꺼워져갔다.



그 굵은 팔뚝이 이렇게 허망하게 허공을 내저을 줄은 몰랐다.


다섯 식구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오사카성을 오르는 언덕길. 할머니는 굵은 팔뚝을 너댓번 휘저으셨다.


휘휘.


야야. 나는 안 되거써야.

나는 여기 쉬고 있을라니께, 너들끼리 갔다와.


남고생도 이겨먹던 팔뚝을 달고 있던 할머니는, 어느새 언덕배기 하나 오르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에이, 할머니만 두고 어떻게 가요.

어차피 저도 힘들었었으니까, 같이 쉬엄쉬엄 가요.


허망한 팔뚝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손주가 천연덕스럽게 할머니 옆에 멈추어 서며 말한다.



저녁.

무사히 구경을 마치고 난 저녁.


다섯 식구의 여행은 언제나 맛집으로 점철된다. 오사카의 저녁이라고 다를리 없다. 사전에 찾아놓은 오사카 맛집 중에 한 곳을 찍어 간다.


오늘 저녁은 규카츠다.



도톤보리 시장 인근의 규카츠 맛집. 지상으로 난 입구로 들어서서 한 층을 내려간다. 테이블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단촐하고 모던한 게 여지 없이 일본스럽다.


다섯이 함께 앉을 테이블도 없어, 둘 셋으로 나눠 앉는다. 그렇지만 밥을 함께 먹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테이블은 딱 두 뼘 남짓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평소의 목소리 크기여도 대화가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식구는, 모두 할머니의 말을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인쟈 난 참말로 안 되겄어야.

나 구경시켜준다고 데리꼬 돌아다니지 말고

담뻔엔 너들끼리 놀러갔다와.


할머니의 가족여행 보이콧 선언. 허탈한듯 가볍게 내쉬는 웃음소리 섞인 한숨은 네 식구의 귀에 깊이 박혔다. 약간의 시간동안,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 했다.


정적.

얼어붙은 공기를 깬 건 서빙되는 규카츠였다.



규카츠는 돈까스와 비교했을 때, 세 가지 정도의 차이점이 있다. 첫째, 돼지고기가 아닌 소고기라는 점. 둘째, 고기를 뒤덮고 있는 옷이 얇지만 무거운 식감의 튀김빵이라는 점. 셋째, 핏기가 가득한 채 나오는 고기를 개인 화로에서 익혀먹는다는 점.


이 중에서 누가 봐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세 번째 특징일 거다. 미디움 레어의 서양 스테이크를 생각나게 하는 선분홍빛 소고기가, 황토색 튀김옷에 잘 둘러싸여 있다. 입술을 살짝 갖다대보면, 심지어 살짝 서늘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덜 익은 고기를 더해주는 건 화로다. 각자 앞에 놓이는 작은 화로 위에는 가벼운 돌로 만들어진 상판이 얹어져 있다. 상판은 기름이 칠해져있어 반들거린다. 그 위에 규카츠를 얹어 취향껏 더 익혀먹으면 된다.


한국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요리. 할머니는 오사카에서 처음 규카츠를 먹었다.



사실 저녁 메뉴로 규카츠를 고를 때, 네 식구가 쑥덕거리며 걱정했던 것이 있다. 할머니의 입맛이다.


이미 늙은 할머니는, 음식이 맛이 없다고 까탈부리지 않는다. 짜면 짠대로, 싱거우면 싱거운대로, 당신이 알아서 고쳐 드신다.


그렇지만 입맛은 예리하다. 당신의 입맛에 안 맞는 음식엔 손조차 대지 않으신다. 때때로, 가족끼리 외식을 나가면, 할머니만 수저를 놓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입에 맞지 않으신 때다.


규카츠. 할머니가 태어나서 처음 드시는 음식. 본인에게 익숙한 음식에도 엄격히 맛을 가리시는 분이, 낯선 메뉴를 생소해하진 않으실까, 안 드시지는 않을까, 나머지 식구들은 걱정했었다. 할머니는 한식을 좋아하시는데.


결론적으로, 기우였다.



다섯 식구 중에 가장 오래된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는 할머니는,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규카츠를 해치우셨다. 화로 위에 고기를 몇 덩이씩 올리고는, 한 번에 두 점씩 집어드셨다.


치이이익-


상판 위에서 고기빛이 변해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네 식구가 놀랄만큼 할머니의 규카츠 먹방은 맛깔났다. 오사카의 저녁밥은 대성공이었다.



할머니는 옛날 사람이다. 많이 옛날 사람이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목도한 세대다.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그조차도 없던 보릿고개를 넘고 자란 사람이다.


할머니의 청춘은 어떤 먹거리로 채워졌을까. 적어도 규카츠는 아닐 거다. 팟타이도 아닐 거고, 마르게리따도 아닐 거다. 젊은 날의 먹거리는, 무채색 가득한 풍경이었을 거다.


할머니도 할머니의 입맛을 몰랐을 거다. 규카츠를 먹어본 적이 있어야,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알지.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본인의 선호를 미리 알 수가 있었겠는가.


우리는 할머니가 한식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할머니는 한식만 좋아하셨던 게 아니라, 한식만 아셨던 거다.



우리의 생각이 짧았다. 할머니가 무채색만 드시는 걸 보며 자라온 터라, 오직 그런 음식만 좋아하신 줄 아셨던 거다. 경험이 덜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잊은 채로.


우리는 할머니 입맛에 규카츠가 맞으실까 걱정하면 안 됐다. 무채색 투성이인 할머니의 먹거리 경험에 우리가 색을 입혀드렸어야 했다. 우리는 색색가지 음식을 먹으며 자라온 세대였으니까.


이제라도 규카츠를 드셔서 다행이었지만

이제서야 규카츠를 드시게해서 죄송했다.


그러고보니 오사카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제서야 오사카에 오시게 했을까.

더 일찍 모실 수 있었는데.


오르막길 오르기 버거운 나이가 되어서야

우리는 할머니를 모시고 오사카를 왔다.



규카츠집을 나서며, 할머니께 말을 건넸다.

가족여행 보이콧에 대한 대답이었다.


"할머니, 다음번에는요, 만리장성 구경가요."


할머니는 웃으셨다.

입으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기분 좋음을 숨길 수 없는 웃음이다.


만리장성.

우리 가족이 코로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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