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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Feb 20. 2019

'불혹에 붓을 잡다' 中최고화가 인민예술가 치바이스

#예술 #치바이스

'불혹에 붓을 잡다' 中 최고화가 인민예술가 치바이스

    '마스터피스'(masterpiece)

   치바이스(齐白石.1864~1957)는 이견 없이 중국 최고의 예술가로 불릴 만 하다.

    그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이 말에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그의 명성을 책으로만 접했을 때는 '아니, 뭐 그 정돈가?'하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보니 왜 치바이스, 치바이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그의 작품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의 작품이 마스터피스기 때문이다.

   걸작 또는 명작이라고도 하는 바로 그 마스터피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클림트의 '유디트'. 이 작품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바로 시대의 장벽 따위는 초월해 버리는 디테일과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

    치바이스의 작품을 보면 그렇다. 경지를 넘어선 예술가와 그가 만든 작품에서 나오는 아우라가 있다.

    치바이스 작품의 어떤 면모가 그의 작품을 마스터피스로 만들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일단, 그의 작품은 디테일이 살아 있다.

    내가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찾아간 북경화원미술관은 그의 작품 2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97세까지 작품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치바이스가 남긴 작품 수는 수만 점에 달한다. 그러나 정점에 있는 작품은 아마도 북경화원미술관에 가장 많을 것이다.

    물론 대만으로 그의 작품을 소유한 국민당 고위급 인사들이 많이 건너가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많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북경화원미술관에서 만난 그의 작품은 이게 정령 붓과 먹으로 그린 작품이 맞나 싶은 정도로 엄청나게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같은 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주 예술가의 세심한 시선을 붓으로 정확하게 표현해 냈다고 할까.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치바이스는 관찰력이 엄청나게 좋은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타고난 성실함이 좋은 눈을 손과 붓끝에 그대로 옮겨붙여 곤충, 새, 물고기, 게, 새우, 풍수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해 낸다.

    또 하나 그의 작품이 마스터피스일 수 있는 요소는 바로 풍류다.

    풍류?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요소인 이 풍류는 내가 확실히 잘 설명할 수 있다.

    내가 나고 자랐던 호남, 그리고 그중에서도 전주는 매우 낙후된 곳이다.

    하지만, 풍류에서만큼은 절대 어느 지역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혹자는 한량 기질이라고도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없는 자의 여유', 또는 '호방함'으로 표현하고 싶다.

    이 풍류는 굉장한 마음의 여유를 가진 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가끔 어느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연배가 지긋하신 노년의 대가들에게서 나는 가끔 풍류를 느낀다.

    요샛말로 하면 '힙하다' 즘으로 표현하면 맞을 것이다.

    치바이스의 그림에는 서양 예술가들과 달리 여유가 있다. 단, 쥐뿔도 없으면서 여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의 정점을 지나서 모든 것을 초탈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말이다.

    그의 그림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작은 물고기 떼를 상단에 배치하고, 조금 큰 물고기 한 마리의 꼬리 쪽 몸통 절반을 맨 아래 배치한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보통 선지보다 길게 뻗은 종이가 독특한 배치로 인해 좌우, 상하로 더 크게 공간이 확장돼 보인다.

    그리고 화폭에 꽉 채워 넣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고 과감하게 절반, 절반을 떡 하니 상하 귀퉁이에 그려 넣고 가운데를 온통 비워 버리는 그의 호방함이 초절정 고수의 허허실실한 초식처럼 강하게 가슴을 때린다.

    내 소감은 이쯤 해두고 그가 초대 명예원장을 역임했던 1957년 설립된 북경화원미술관 관계자의 치바이스에 대한 평을 들어보자.

    북경화원미술관 전시실 한편에 마련된 서점에서 겨우 한 권 남은 도록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 도록은 '중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지난해 열린 '치바이스-중국 근대 회화거장'이라는 전시 도록이었다.

    이 전시는 북경화원과 도쿄국립박물관, 교도국립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것인데 라인업만 봐도 대단한 전시였음이 분명하다.

    도록 맨 앞에 보면 북경화원 부원장인 우홍량(吴洪亮)이 쓴 축사에 치바이스의 작품에 대한 평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치바이스는 시, 서, 화, 인(전각) '사색'에 모두 뛰어난 작가다. 그의 작품은 기세가 웅장하고, 강하며, 독특한 기풍이 있고, 자연의 정취가 넘친다. 그의 예술과 내뿜는 기세는 사람을 감탄시키고, 고금을 관통한다.'

    '회화에 있어서는 색채의 농염이 명쾌하고, 필법이 간결하면서도 강경하고, 묵법(墨法)은 자유자재이고, 산수, 꽃, 새, 물고기, 새우 등 소재가 매우 광범위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익살스러움(유머)이 담겨 있고, 작은 곤충들은 그 디테일이 극단까지 살아 있어 관찰력의 끝을 달린다.'


    짧은 지면의 한계를 고려하면 엄청 축약해 그의 작품과 예술 세계를 설명한 말인데 여기에 뭘 더 보태고, 빼고 할 것 없이 정확하게 치바이스의 예술을 표현한 문장이라 하겠다.

    나는 무엇보다도 '고금을 관통한다'는 부분이 가장 와 닿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요새 작가가 그린 것인지 옛사람이 그린 것인지 헛갈릴 정도다.

    뭐가 그러냐면 약간 익살스러운 맛이 있다고 할까. 진중한 가운데 '큭큭' 웃음소리가 나오게 하는 맛이 있고, 그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인해 굉장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특히 후기 작품을 보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같이 간단한 선과 딱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스케치 같은 그림들이 많은데 서양 최고 수준 예술가들의 스케치에서 느껴지는 포스가 나 같은 문외한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확 느껴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불혹인 40세부터였다는 것이다.

    그가 엄청난 재능이 있었지만, 이를 꽃 피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마다하치 않는 노력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록에 소개된 그의 생애를 잠시 소개해 보면,

   치바이스는 청대 동치제 2년인 1864년(1860년이런 설이 더 유력) 1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전 국가 주석의 고향인 후난(湖南)성 샹저(湘泽)시 바이스포(白石鋪)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치황(齐璜)으로 작품에는 이름을 적기도 하고, 호인 바이스를 적기도 한다. 이름과 호 모두 개명을 한 것으로 전 이름은 치춘즈(齐纯芝), 호는 란팅(兰亭)이었다..

    어려서는 산천을 돌아다니며 동생과 함께 소를 먹이는 게 주요 일과였다니 그의 산수에 대한 감수성은 이 시기에 형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은 아버지를 대신해 목공 일을 하며 집안 생계를 책임졌다. 손님들은 천편일률적인 가구의 문양보다는 약간씩 변칙을 주는 그의 솜씨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의 손재주가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7세가 됐을 때는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샹저 지역 화가인 후친위안(胡沁园)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공필화(디테일을 살리는 사실화)를 가르쳤다. 당시에 치바이스는 바이스산런(白石山人)이라는 별호를 섰는데 '치바이스'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10년 뒤에는 1899년에는 경학 대사인 왕샹치(王湘绮)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문학적 수양을 닦는다. 치바이스는 40세 이전에는 고향인 샹저에 주로 머물렀지만, 이후에는 그의 친구의 초청으로 시안(西安)에 가정 교사로 가면서 예술 유람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이후에는 베이징으로 가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그 뒤에도 상하이, 장시(江西), 장쑤(江蘇), 광시(廣西), 광저우(廣州), 홍콩 등을 떠돌며 수양을 쌓는다.

    예술가로서 정진하던 그는 일본 강점기, 국공내전 등의 풍파를 거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1927년에는 북경 국립예술전문학교 교수가 됐고,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후 건립된 중앙미술학원의 교수도 역임했다.

    노년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던 그는 1956년 '국제평화상'을 수상했고, 1957년에는 북경화원 명예원장이 됐고, 같은 해 9월 16일 병환으로 소천했다.

    중국 당국은 생전에 그에게 '인민예술가' 명예장을 수여했으며, 국가급 예술가로서 극진한 대우를 해줬다.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전 총리는 그가 노년에 편하게 작품활동을 하도록 많은 배려를 했고, 베이징의 위얼(雨兒) 후통에 거처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낭중지추(囊中之錐)가 생각난다.

    아무리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도, 목공 일을 해도, 문화계에서 큰 대접을 받지 못하는 공필화가로 있어도 결국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그가 예술혼을 불태우도록 도왔다.

    당연히 빛나는 그의 재능과 노력이 밑바탕이 됐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치바이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면서도 여유를 갖는 호방함이 있었다.

    작품 세계에서는 치열함을 추구했지만, 예술 대중화를 위해서 예술에 대한 문턱을 낮추는 것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좋은 작품은 누가 보아도 좋다' 근대 작가인 치바이스의 작품은 피카소 다음으로 가장 비싼 작품이 됐다.

     치바이스가 82세에 장개석에게 그려줬다는 '송백고립도'는 2011년 베이징 경매에서 714억원에 낙찰됐고, 2017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는 '산수 12조병'가 1532억원의 경매가를 기록하며 중국 미술품 최가가를 경신했다.

산수 12조병
송백고립도

    그의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 만든 '마스터피스'는 후대 사람들의 눈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도록을 보면 그의 노년시절 그림에는 재밌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의 나이를 적어 둔 것인데 아마도 삶의 종착지에 다다랐음을 직감한 그가 자신이 과연 언제까지 작품활동을 할 것인지 또 언제까지 붓을 놓지 않았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치바이스의 작품을 보고 와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인 것 같아 곯아떨어진 몸을 침대에서 일으켜 긴 글을 남긴다.

#치바이스 #마스터피스

치바이스 12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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