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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Mar 17. 2019

남편들의 비상금 통장을 위한 변명

#에세이


<남편들의 비상금 통장을 위한 변명>

    "꼭 그렇게 다 가져야만 했냐!"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 되었다.
    비상금 통장을 뺏긴다는 것은 남자로서 거세를 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다.
    '내가 벌어왔는데 좀 딴 주머니 차면 어떠냐" 이런 고리짝 시절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도 '자기 돈'이 필요한 데가 있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다.
    비상금이라고 해봐야 쥐꼬리만 한 데다 써 봐야 출장 가서 애들 선물 같은 거 사거나 와이프 탈모방지 샴푸나 사지 뭐 나한테 쓰는 거 하나 없다.
    와이프 눈치 보여 못 주는 본가 식구들 병원비나 엄마, 아빠 생신에 밥 한번 친구들한테 크게 사라고 찔러 주는 것이 가장 큰 일탈이다.
    가끔 후배들 만나면 폼 한번 잡아 보려고 참치 같은 거 사주고, 준코 같은 데도 데려가기도 하지만, 그거 일 년에 많아 봐야 30~40만 원?
    근데 그걸 끝까지 뺏으려고 말이야. 사냥꾼이 뒷다리를 다친 사슴을 벼랑 끝으로 몰듯이 쫓아오고, 김영삼 대통령 금융실명제 하듯이 자금을 추적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도 가끔 야근한다고 구라 치고 IMAX 가서 어벤저스 같은 거도 보고, 임재범, 신승훈 형님 같은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도 보고 싶고 그렇다.
    원피스 피규어 사고 싶어서 한 푼 한 푼 모아서 전주 형이랑 아키하바라 가고 싶었는데 이렇게 걸리면 세상이 무너진 거 같은 마음을 늬네가 아니?
    못된 것들.
    이게 근 2년을 모은 건데 다 들려 나간다고 생각하니 군 생활을 두 번 하는 싸이의 심정이 따로 없다.
    수당 통장이야 새로 파면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몰래몰래 키득대면서 모았던 방송 수당이나 명절 근무 수당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통장을 넘기는 이 시점에서 담당 피디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김 기자님, 바깥에 나가 계신 데 방송 가능하시겠어요?"
    "아이고, 바깥에 있다고 일 못 하면 사무직 하지 뭐하러 기자 한대요. 하모요. 하모요. 어서 주소"


    담당 피디의 수화기 너머 들려오던 대사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가 전두엽을 지나 대뇌 피질로 아스라이 사라진다.
    명절 근무를 짤 때도 선배가 "진방이 하루 더 쉴래?" 하면 "아이고, 선배 막내가 하루 더 해야지요. 가서 애들이랑 하루 더 놀아 주세요"하던 내가 미워진다.
    아. 님은 갔습니다.
    인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미련 가져야 뭐하겠나. 떠나보낼 때를 알아야 새로운 만남도 준비하는 것을 받아들이자.
    이제 폼나는 아빠와 폼나는 선배는 한동안 못하겠구나.
    수당 통장아 그동안 수고했다. 대학 때 카드 판매하시던 아주머니께 속아 너를 처음 만들고 지난 10여 년간 잘 썼다. 그곳에서도 잘 지내렴.
    별이 아스라이 지듯이 사이버 통장이지만 너의 마지막 금전출납부가 넘어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린다.
    남편들이여 들으라.
    지금은 물러가지만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 또 다른 거사를 도모할 것이다.
    그리고 록수를 비롯한 세상 모든 와이프에게 고한다.
    "꼭 그렇게 다 가져야만 했냐!"
#단상 #남편의비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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