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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Apr 21. 2019

'상선약수의 미학' 천 년 역사의 폭포마을 부용진

장가계까지 가서 부용진을 안 보고 온다고?


'상선약수의 미학' 천 년 역사의 폭포마을 부용진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아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이라 했던 노자 사상의 핵심이 오롯이 담긴 곳에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시원스레 직전 낙하하며 떨어지는 폭포수를 포근히 둘러싸고 늘어선 부용진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에라도 도가의 도(道)를 깨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도를 깨친 신선이 잠시 쉬어 가는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용진의 경관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토사왕(부용진에 사는 토가족의 옛 왕)이 왜 이곳을 여름 궁전으로 삼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용진은 바라보기만 해도 잘 깎은 호박석같이 질박하면서도 귀한 느낌이 난다.


    부용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폭포 위 토사왕 행궁 누각에 서면 자연과 인간 문명이 하나로 조화를 이룬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폭포 옆 절벽 사이사이에 들어선 토가족의 가옥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경에 스며들어 마치 실존하지 않는 허상의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동양의 언어로는 환상, 서양의 말로는 판타지.
    도가의 신선이나 살 법한 너무나 이상적인 모습이 역설적이게도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부용진은 거짓말 같은 공간이다.
    그 모습을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것이 가당치도 않지만 감히 묘사를 해보자면,
    마을 중심을 가로지르는 높이 60m의 새하얀 폭포 물줄기가 온종일 시원한 물소리로 마을 골목골목을 채우고, 아름드리 월계 나무와 폭포가 빚어낸 기암절벽이 얽히고설켜 절벽을 수놓는다.
    그리고 대자연이 닦아 놓은 터 위에 내려앉은 토가족 전통 가옥들은 위화감이 전혀 없이 폭포와 합을 맞춘다.

     주변 산세와 꼭 맞게 모양을 맞춘 토가족 가옥의 처마는 미인의 입꼬리처럼 사뿐하게 말려 올라가 폭포와 원래 한 몸인 양 조신하게 병풍을 둘러친 듯 절벽 위에 얹혀 있다.

토가족 전통 가옥

    부용진은 중국적인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느끼게 해주는 공간임이 틀림없다. 천연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고, 인간 문명과 자연이 조화의 극치를 빚어낸 동양 미학의 정수와 같달까.
    아름다운 외관 못지않게 이곳을 지키는 토가족의 문화도 부용진을 더 향기롭게 하는 요소다.
    부용진을 천 년 넘게 지켜온 토가족의 온화하면서도 강인함이 느껴지는 기상은 그들의 삶의 터전과 똑 닮아있다.
    토가족은 말 그대로 소수민족이지만, 중국 소수민족 역사상 가장 긴 왕조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강건한 민족이다.
    토사(土司) 왕조라 불리는 토사족 왕국의 역사는 AD 818년부터 시작해 220년 넘게 지속했다. 중원의 패자가 수시로 바뀌던 중국 대륙의 역사를 비춰보면 소수민족 왕조가 28대에 걸쳐 생존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토가족의 강인한 생명력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마치 부용진의 폭포와 절벽처럼 말이다.
    다툼이 없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신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상선약수의 경지가 이들이 천 년 넘게 자신의 모습을 지켜온 힘이 됐다.

토가족 전통 춤


    덕분에 부연이 없이도 부용진을 거닐다 보면 조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다른 관광지와 달리 부용진에는 '원주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인위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관광이라는 명목 아래 인위적으로 꾸민 공간이 아니라 주민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가족이 자신들의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공간에 외부인들이 잠시 들러 지나치듯 구경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절벽을 따라 굽이굽이 나 있는 골목을 거닐면 부용진의 원주민들이 널어놓은 빨래라든지,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전통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 장사 준비로 분주한 상인들의 모습을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다.
    마치 폭포를 둘러싸고 늘어선 토가족의 전통 가옥이 본디 자연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듯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부용진의 품 안에 폭 묻혀 물과 같이 부딪힘이 없다.



    이들의 걸음걸이와 말투, 눈빛에서 나오는 온화함은 한두 세대에 걸쳐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독창적인 문화가 자리하려면 적어도 수백 수천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문명 중심지에서 목도해 왔다.
    부용진에서는 이 조화로움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음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부용진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진(秦) 나라(BC220년 무렵) 때이다.
    통일 왕조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전국의 영웅들이 각축을 벌이던 이 시기, 전란을 피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부용진의 폭포 아래 동굴로 숨어들었다.
    피난민들은 폭포 물줄기가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 낸 이 동굴에서 긴 머리에 붉은 발을 가진(長髮赤脚) 모습의 토인(土人)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새소리와 짐승 소리로 소통을 했다고 하는데 외관과 달리 성실하고 온화해 전란을 피해 도망쳐 온 이방인들을 반겨주었다고 한다.
    전란을 피해 부용진에 들어온 중원의 사람들과 원주민들은 마음을 합하여 이곳을 가꾸어 새롭게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부용진은 역사를 이어가며 후손들의 삶의 터전이 돼주고 있다.

토가족 전통 의상을 입은 꼬마

    이런 전통은 그들이 먹고, 자고, 일하는 가옥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모든 건물의 방향이 폭포를 향하고 있는 구조로 돼 있는 가옥들은 정남쪽을 바라보는 폭포 덕분에 남쪽을 바라보고 서서 고개를 폭포로 향하고 있는 모양새다.
    간혹 폭포에서 먼 곳에 자리한 건물들은 빛이 부족한 곳에 자리하게 된다. 이럴 때 토가족은 건물을 주변의 흐름에 거슬리게 돌려세우기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살리면서 단점을 보완하는 쪽을 택했다.
    폭포를 바라보고 왼편에 치우쳐 자리한 소금 창고는 이런 토가족 건축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일단은 빛이 적은 자리답게 용도를 소금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고, 자연광이 부족한 위치를 보완하기 위해 창고 정 가운데 천장 부분을 정사각 모양으로 터놓았다.
    해가 뜨는 새벽에는 어스름하게 천정을 통해 건물 안이 비추고, 달이 뜨는 밤에는 천정을 통해 달빛이 스며들어 빛이 없어도 형체를 분간할 정도로 시야가 트인다.
    자연, 터전, 사람, 문화가 조화로움이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모인 부용진의 매력은 이렇게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물처럼 다투지 않고 겸손하게 서로 조화를 이루는 토가족과 부용진의 폭포는 역사의 강줄기를 따라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photo by Kimdongwook



#부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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