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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돼지터리언국 총리 Sep 24. 2019

글이 멈췄다, 나도 멈춘다

#글

말라버린 글에 대하여

    '글이 메말랐다'
    그렇게도 줄줄 써지던 글이 언제 그랬냐는 듯 깡그리 말라버렸다.
    딱히 뭘 쓰려고 하지 않아도 자판 앞에 앉으면 글이 술술 나왔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전에도 이따금 글이 써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조용히 책상 앞에 앉거나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 글을 읽으면 나도 다시 자판을 두드릴 수 있었다.
    때론 침묵이 좋은 거라고들 말해 가만히 며칠을 있어 보았다.
    전처럼 마음속에 글이 다시 차오르겠지. 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글이란 것이 참 묘한 게 쓸 때면 치유의 힘이 있지만, 막히면 또 꽤 괴로운 고통을 주기도 한다.
    지금 내가 그렇다.
    뭔가 불안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글을 안 쓰고 있자니 답답하고, 멍하니 있으면 불안감이 어둑시니 같이 찾아와 커튼 뒤 그늘 안에 서 있다.
    노트북으로 틀어 놓은 넷플릭스를 보면서도 내용에 큰 관심이 없다. 글을 쓰지 않으니 켜 두는 거다.
    벌써 지친 것일까. 아니면 쏟아낼 만큼 쏟아내 이제 글 샘이 바닥이 난 걸까.
    머리를 쥐어짜며 안간힘을 써봐도 써지는 건 휴지통에 넣기도 아까운 졸필 원고가 전부다.
    그래서 지금 느끼고 있는 내 감정을 자근자근 쪼개서 써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쓰고 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집 거실에서 다기를 옆에 두고 조그마한 애들 좌식 책상을 편 뒤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렸다.
    노트북 옆에 전자 탁상시계를 두고 분침이 가는 것을 멍하니 보며 자판 위에 손을 얹었다.
    기승전결, 마지막 반전, 괜히 겸연쩍어 집어넣는 우스갯소리.
    이런 것들을 다 머리 저편으로 밀어버리고 지금 심정을 툭.툭.툭 적어 내려가다 보니 다시 손과 머리가 움직인다.
    오래 세워둬서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것 같지만, 이내 제법 빠른 속도로 페달이 굴러간다.

    머리가 도는 이 틈에 다시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 본다.
    왜 글이 말랐을까?
    곧 임기를 마칠 때가 되니 불투명한 앞날이 걱정돼서 그랬을까? 아니면 인간관계가 힘들어져 그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지만 딱 들어맞는 이유는 찾지 못했다.
    하기야 세상에 한 가지 이유로 일어나는 일이 몇 개나 되겠나.
    한가해진 일, 아니 일이 손에 붙어 한가롭게 느껴지는 일, 반복되는 일상, 곧 바뀔 것 같은 생활환경,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요즘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됐으려나.
    아. 그리고 읽히지 않는 책도 한몫했겠지.
    오늘 낮에는 영상을 보는 것마저 지겨워져 책을 펴 들었는데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책장에 머리를 파묻고 쓰러졌다. 잠이 든 거다.
    책을 책으로 보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채우는 용도로 읽으니 그랬을 거다.
    기자실을 나와 집으로 운전해서 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 이렇게까지 글을 써야 하나?'
    생각이 채 머리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직은 더 써야 한다. 아니 더 쓰고 싶다.
    첫 도둑질에 나선 도둑마냥 황급히 생각을 누구에게 들킬까 봐 서둘러 주워 담았다.
    그리고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해 차 안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분명 컨디션도 올라오고, 일도 손에 익어 시간도 더 나는 데 쓰는 것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세상천지에 이해되는 일이 몇이나 있겠냐만은 아무튼 그랬다.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은 뒤로는 내 글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베이징에서는 글이 쓰고 싶어 졌다.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처럼 다른 세상이 주는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낯선 세상이 내 속에 있는 글 샘에 마중물을 부었을까.
    무슨 이유든 용솟음치는 글자들을 씹어 삼켜 다시 손으로 뱉는 일은 매우 자연스럽고, 갓난쟁이 때부터 내가 하던 일 같았다.
    어쩌면 요즘 내게 찾아온 글 가뭄은 다시 이상한 나라에서 나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가 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3년 전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떠올려 본다. 그때가 싫었는지 좋았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조만간 가든 1년 뒤 가든 이제는 그곳에 남겨두고 온 내 자리를 다시 더듬어 본다.
    글이 마른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글가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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