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돈도 없는 게'
오늘은 교회에 가는 날.
교회하면 가장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헌금'.
어려서 형편이 시원찮던 나에게 가장 심리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던 존재인 헌금.
아주 어릴 땐 100원. 좀 커선 500원. 사춘기 땐 1000원. 대학생 땐 5000원….
나의 헌금의 역사는 나의 재산 상황과 상관없이 커져 왔다.
'이거 꼬불치면 스트리트 파이터가 5판인데. 아. 낼까? 말까?', '이거면 당구 한판, 스타 한판인데. 아. 고민되네'
어린 것 마음속에 지펴지는 그 갈등의 불싸라기란 그 어떤 심리적 고난보다 큰 것이었다.
매주 걷는 주정헌금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교회 다닌다는 소리를 하면 가끔 받는 질문이 있다.
"거 왜 자꾸 십일조 내라고 합니까?"
내 말이. 주정헌금 내기도 빠듯한데 왜 자꾸 십일조를 내라고 하나. 뭐 버는 게 없으니 내라면 내겠다마는 죽을 맛 아닌가.
그래도 수입 1전 없는 어려서부터 용돈 쪼개서 내던 것이니 잘 내고 있다.
'에이. 형편이 좋은가 보네. 그림도 사고, 잘 먹고 다니고 그러던데'
그렇다. 형편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잘 번다기보다는 그냥 잘 쓰는 편이다. 경제관념이 없다고 봐야 하는 게 맞다. 뭐. 하여튼 그렇다.
어느 날은 그렇게 소처럼 벌어도 왜 이렇게 모이는 것이 없는가 가만히 생각해 봤다. 우리 부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집에 금송아지 쌓아 놨을 거라는 소리다.
왜냐하면, 소처럼 일하는 나와 짠순이 오브 짠순이인 와이프가 돈을 못 모을 리가 없다는 가설을 세우고 우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돈이 없다. 아니. 나 어렸을 적보다는 무척 많지만, 돈이 차고 넘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없이 자란 성장배경인 나와 또 하나는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나, 이렇게 두 가지의 나로 인한 원인이 작용한 결과다.
어려서 가난하게 자란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미치도록 돈을 모으며 성실하게 부를 쌓는 사람. 아주 바람직하고 본받을 만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나처럼 '뭐. 더 없이도 살았는데. 좀 덜 입고, 좀 불편하게 살면 돼'라고 생각하며 흥청망청인 사람. 아주 비모범적이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두 가지 원인 중 우리 집 경제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무래도 경제관념이라고는 전혀 없이 지출을 집행하는 '기분파'인 나의 캐릭터일 테다. 그걸 지켜보는 와이프도 이제 반쯤은 포기하고, 너만 쓰냐. 나도 쓰자. 하면서 촛불잔치를 벌여보자 하며 에헤야 디야 하고 있다. 그래서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하는 중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돈에 집착하지 않는 사고가 머릿속에 깊숙이 박혔을까.
앞에서 나온 질문을 다시 가져와 보자.
"거 왜 자꾸 십일조 내라고 합니까?" 그렇다. 원인은 십일조에 있다.
사실 요즘 많이 교회가 상업화하고, 개인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이용돼서 그렇지 십일조라는 것이 그렇게 썩 나쁜 것은 아니다. 신을 믿든 안 믿든 자기가 번 것의 10분의 1이든, 100분의 1이든 사회에 돌려준다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다들 이 정도는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말한 것처럼 내가 얼마를 벌었든 사람 홀로된 것 없고, 세상사 혼자 잘난 것 없다. 월급도 홀로 된 것은 아니란 뜻이다.
그래도 나는 교회에 내기 싫은데? 흥. 그럼 다른 데 내면 된다. 나처럼. 서울에 올라와서부터 대형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사람은 헌금에 대한 내적 갈등이 다시 시작됐을 거다. 아. 이걸 여기에 내야 하나. 아니면 시골에 있는 우리 교회에 내야 하나. 여기는 나 아녀도 삐까뻔쩍한데 헌 누더기 같은 건물에 쌀 모아 밥 지어 먹고, 내 등록금 내줬던 권사님들 얼굴이 왔다 갔다 하는 거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예배 장소만 빌리는 것으로 하고 조금 죄송하지만, 후자를 택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편법 십일조는 시골 교회에서 자선단체로, 자선단체에서 우리 모교로, 개별적으로 연락 오시는 분, 취재하다 만난 어려운 이웃, 저~기 지구 반대편에 사는 맹그로브 숲 아이들, 누나가 사는 말레이시아 정글 속 교회로 더 교회와 상관없이 흩어져 가고 있다.
내 자랑이 아니라 어차피 저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에 쓸지만 결정하면 될 문제다. 그걸 지켜보는 록수의 분노와 식구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어느 날은 내가 헛짓을 해서 우리 집 재정이 와장창 난 적이 있다. 집안 곳간이 기우니 다시 시작된 내적 갈등. 아니다. 이럴 때 더 해야 한다. 이 악물고 액수를 더 늘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경제관념 없이 막사나. 퍼주기 좋아하는 엄마 닮아 그런가. 엄마는 마이너스 재정을 굴리는 재주라도 있지. 나는 또 그렇지도 않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십일조' 헌금 봉투.
100원, 1000원, 5000원, 10000원….
아. 하루아침에 이러는 게 아니구나. 극심한 내적 갈등 상황에서 그 자주색 헝겁에 황금 십자가가 박힌 헌금통 안으로 손에 땀이 나게 아까워 쥐고 있던 동전을 놓는 훈련을 평생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얼토당토않은 경제관념은 거기서 왔다. 남을 위해 내놓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 안 한다고 당연히 욕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엄청난 결심이 필요하고, 아무리 기분파라도 쉽지 않은 문제다. 태릉선수촌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지 않으면 실전에서 제대로 된 기술을 하나도 쓸 수가 없다. 연습이고, 수행인 셈이다.
다 같이 그리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내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교회도 안 다니는데 무슨 십일조인가. 그럴 바에 고생한 부모님 용돈이나 더 드리면 된다. 먹고 죽을 돈도 없으면 안 하면 된다. 이건 자랑도 뭣도 아니고, 그냥 내 가난의 역사와 흥청망청에 대한 기록일뿐이다.
어느 날 록수한테 왜 이렇게 돈이 부족할까. 하고 물었더니.
'그래도 우린 젊은 나이에 애들 둘 저만큼 키웠으니 남는 장사지' 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 짠순이도 이제 텄구나 텄어. 우리 집은 평생 이 모양으로 살 것 같다.
괜찮다. 죽을 때는 이건희 회장이나 나나 재산 다 놓아두고 노잣돈 똑같이 들고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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