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잠이 없어진 나에 대한 단상>
'그러다 죽는다'
요즘 내가 자주 듣는 말이다.
누구한테 듣느냐면 와이프한테 자주 듣는 말이다.
와이프한테 무슨 잘못을 해서 듣는 게 아니라 록수 방식의 걱정 어린 표현으로 내뱉는 말이다.
요즘 잠이 부쩍 줄었다.
불면증 같은 게 아니라 예전에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잠시 나와 집에서 하룻밤을 자던 토요일 만화책을 잔뜩 빌려서 쌓아 놓고 흐뭇해 하던 나와 비슷한 거다.
유학 시절 와이프 몰래 플레이스테이션 미니를 사서 매일 밤 신나게 위닝 일레븐을 하던 때랑 같은 거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하루 세 편씩 꼬박꼬박 영화를 보던 그런 거다.
후배 놈이 던져두고 간 왕자의 게임과 워킹데드, 나르코스, 바이킹스 DVD를 우연히 봤을 때처럼 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요즘 잠이 드는 게 아까울 정도로 무언가를 계속 쓰고, 적고, 생각하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 기사 보기를 돌같이 하던 내가 뭔가를 쓰기 위해 잠을 안 잔다니 정말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다.
글을 쓰고 나서 보니 하루하루가 쓸 것 천지고, 또 쓰고 싶은 거 천지다.
어디 가서 무얼 하든 아. 이건 이렇게 쓰면 되겠다. 이건 내일쯤 쓰면 되겠다. 저건 어제 썼어야 하는데 밀려서 버려야겠네. 라고 한 게 두 달째.
글이 쌓이고 쌓여 벌써 책 두 권 분량이 넘게 쌓여 버렸다.
그중에는 쓸데없는 헷소리도 많고, 진지한 글도 있고, 나중에 읽어 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설도 수두룩하다.
폐탄광처럼 쓸데없는 잡석 더미 같지만, 옥석을 가려내 숯검둥을 툭툭 털어 내고 보면 가끔 어여쁜 글도 눈에 띈다. 그럴 때면 잠 좀 들 자면 어때라는 생각이 들며 다시 기운이 돈다.
글을 쓰면서 삶에 활력도 생기고 모든 게 다 좋은 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바로 쓰다보니 읽을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독서량이 내 투자 수익률처럼 -80%가 됐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읽는 시간에 쓰고 있고, 읽다가 보면 쓰고 싶고, 다 쓰고 나서 책 좀 펴들면 골아 떨어져 버린다.
사실 요즘은 독서라는 행위를 글을 쓰다가 몸이 너무 피곤하면 돼지 같은 몸뚱이를 쓰러뜨리는 마취총 같이 사용하고 있다.
독서량이 부족하니 요새 글에서 날선 느낌이 잘 안 난다. 어휘에 결핍이 온다는 말이다. 문장이 반복되고, 쓰는 단어가 나도 모르는 새 나오고 또 나온다. 그래서 쓰고 나서 다시 고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런 때는 좀 마른 우물에 물을 잡듯이 며칠 쉬어 주면 될 텐데 이게 아까 말한 대로 겨울에 밍크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면서 만화책 보는 것처럼 재미지다 보니 끊기가 쉽지가 않다.
뭐라도 대책을 강구해야겠어서 임시방편을 마련했다.
일단 새벽에 일어나면 손꾸락을 꽁꽁 싸매 놓은 다음에 한국에서 사 온 윤동주 시인의 초판본 시집을 꺼내 한 편 읽는다. 이게 문장을 수식하는 어휘를 채우는 데는 큰 도움이 안 되지만, 나같은 음치에게는 문장에 운율을 불어넣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편은 그냥 내 글을 읽고 있다. 혹시 주변에 아는 기자가 있으면 물어보라. 자신이 쓴 기사를 읽는 기자가 있는지 말이다. 아마 거의 없을 거다. 기자들은 자기 출입처 다른 기자의 기사는 읽어도 자기 기사는 잘 안 읽는다.
요새 나는 내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브런치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서 내 글을 찬찬히 읽어 보고 있는데 거북이 독서를 하는 내가 정말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 내려간다. 당연히 내가 쓴 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근데 또 이게 엄청 재밌다. 내 글을 읽고 재밌다니 천지가 비웃을 일이지만, 재밌다.
이런 표현을 썼네, 요렇게 수미쌍관을 해놨네. 어이구야 이런 이야기까지 썼네. 잘하고 앉아 있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싸 놓은 똥을 보는 게 부끄럽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하다.
어제는 자의 반 타의 반 결혼기념일을 기념하야 서울시 국악 관현악단 공연을 봤다.
그러면서 요새 맞닥뜨린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왜 꼭 읽으려고만 하는가. 쓰느라고 '텍스트'가 질렸으면, 다른 것으로 콘텐츠를 채우면 될 일 아닌가.
어제도 집에 돌아오는 전철에서 공연 리뷰를 쓰면서도 그래. 그래.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런 거 쓸데없이 노트에 적어 가며 열심히 J군이 준 클라식CD 들었는데. 그게 다 쓰잘데기 없는 일이 아니었네. 과거의 나녀석 잘했다. 잘했다. 잘했다아. 하며 왔다.
그러다가 전주에서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 판소리에 조예가 깊은 선배가 '그래도 서편제의 고장에서 기자질 하는데 소리 한 대목들은 다 혀야 혀'해서 외웠던 춘향전 사랑가 중 한 대목이 떠올랐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나온 '두번째 달'이란 그룹과 젊은 소리꾼 이봉근님이 함께 부른 노래를 듣다가 사랑가나 외워볼까 해 한 두어 달을 차 탈 때마다 조통달 명창 버전으로 듣고 다녔었는데 그 가사가 떠오른 것이다.
당시에도 그랬고, 어제도 느꼈는데 판소리는 언어의 보고다. 어휘력이 달린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으면 귀에 익숙한 판소리를 찾아서 들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맛깔스러운 그 표현들이 주는 풍류와 구성진 멋이란 들어본 사람만 안다.
오늘은 당시 내가 들었던 판소리 사랑가 중 한 대목에서 주옥같은 표현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까지는 많이 아는 대목이고 진짜는 그 뒤에 나온다.
이몽룡이 춘향이를 보기만 해도 마음이 동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작업을 거는 멘트인데 요샛말로 막 들이대는 작업 멘트다. 일단 먹을 거로 어린 춘향이를 꼬시는 대목 일부만 옮겨 적어 보자면,
'네가 무엇을 먹으려 느냐. 둥글둥글 수박 웃봉지 떼뜨리고, 강~릉 백청을 다르르르르 부어 씨랑 발라 버리고, 붉은 점 웁푹 떠 반간 진수로 먹으려 느냐'
그럼 춘향 파트에서 '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라며 교태를 부리는 것이 참 매력.
'그러면 무엇을 먹으려 느냐. 당 동지 지루지허니 외~가지, 단참외 먹으랴 느냐'
그럼 또 춘향이가 튕긴다. 포기할 이몽룡이 아니다.
'니가 무엇을 먹으려느냐. 앵도를 주랴 포도를 주랴 귤병사탕의 회화당을 주랴. 아마도 내사랑아. 그러면 무엇을 먹으려느냐'
여기서 또 튕기기 전에 이몽룡이 상남자 어택에 들어간다.
'시금 털털 개살구 작은 이도령 서(?)는데 먹으려느냐'
크흡. 그렇다. 사랑가는 야한 노래였다.
#단상 #국악삘제대로받음 #사랑가들어보세요 #두번째달노래들음맛배기가능합니다 #유튜브를켜세요
++돼지터리언 베이징 방랑기 구독해주세요.
에세이 시리즈 <단상>
생생한 베이징 특파원 취재현장 <취재현장>
동물이야기 <초보 댕댕이시터의 보모일기>
지금 들러보세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