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olation of Literature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꼭 필요한 것은 어쩌면 '제정신 아님' 일지도 모른다. '제정신'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과 자신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고체계를 떼어내지 못했다는 핑계일 뿐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다 보면 자신의 몸뚱이에 사고체계가 파묻히고 나의 정신과 의지는 함몰되어 시야가 가려진다. 그렇다면 '제정신 아님'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드라마 속 주인공 보듯이 나를 보는 것, 그리고 세상이라는 공간을 외지로 인식하여 나 자신을 떠돌이 신세로 만들어 끝없는 불안함과 눈치 보기를 허용하는 것.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나를 분리시킨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재고해보아야 할 것은 분리로부터 오는 고통의 근원이다. 라캉은 "분리에서 오는 불안은 분리 자체가 아니라 분리의 실패에서 비롯된다"라고 한다. 그렇기에 마침내 자신이 완전한 혼자가 되었을 때 극도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혼자가 되어 완전한 분리를 경험하는 가장 간단한 수단이 바로 문학이 아닐까. 문학을 읽으며 우리는 어느 정도의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완전한 분리로 가는 과정은 불안하고 끊임없이 떨리며, 그렇기에 되돌아가고픈 충동이 들이닥치기도 한다. 하지만 분리가 완료되는 순간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안락함을 느낀다. 나는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이 행위는 나로부터 단순히 한 걸음 떨어져서 2인칭 시점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완전한 타자로, 특정한 시점을 갖지 않는 완전한 전지적 3인칭 시점으로 나를 인도하는 듯하다. 그러한 경험을 돕는 것은 익숙함이 아닌 낯섦이다. 낯섦 속에 당의(糖衣)로써 씌워져 있는 익숙함은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일시적 고통의 완화제로써 당의는 나에게 작용하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당의 내부의 약제는 나에게 흡수되어 사유 체계를 나의 육체와 현실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그 해방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러한 해방감을 영속시킬 수 있는 것일까.
현실감각 없다는 말은 현실이라는 전쟁터에서 탈영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그는 지탄받기도 하며 탈영 전의 삶보다 열악한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탈영병의 과거 위치가 아니라 그가 탈영이라는 행위를 함으로써 승자 또는 패자로 정의되고 서열화되는 환경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선 또는 악으로 이분법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탈영 행위로부터 탈영병은 자기 승화를 경험하며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이승우는 <소돔의 하룻밤>에서 "밀착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매몰되면 시야가 없어진다"라고 말한다. 매몰된 순간에 느껴지는 것은 사물의 윤곽이나 빛과 그림자가 아니라 촉각에서 비롯되는 유래 불분명한 쾌락 또는 고통뿐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자극이라 할 수 있다. 자극은 정도에 따라 쾌락 또는 고통이 되기에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자극의 정도를 예측한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을 위해서는 매몰된 상태에서 빠져나와 눈을 뜰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매몰 상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마치 비행과 같아서, 중력이 작용하는 비행 주체는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양력을 제공하는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기에 비행을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연료 공급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행 상태는 곧 종료되고 밀도 높은 매몰 상태로 주체는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비행의 경험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침잠 중 온몸으로 느껴지는, 사방으로부터 내부로 향하는 촉각적 자극 속에서도 육체 내부에 보호되는 정신은 비상을 꿈꾸고 있으며 그 정신은 비행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유체계와는 달리 육체에게 중력을 거역하는 발길질을 요구한다. 그러한 발길질로 인해 육체는 조금이나마 가라앉음을 중지하거나 밀도가 낮은 곳으로 부유할 수 있으며 충분한 에너지를 받으면 다시금 비행하기도 한다.
어쩌면 지속적인 비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행과 침잠이 반복되고 빈도가 높아지며 기류와 에너지 공급의 불안 속에 수직적 활동범위가 넓어질수록 금속이 담금질을 거듭할수록 순수해지듯이 우리의 사유체계는 맑아지며 매몰 속의 무차별한 자극을 무시할 수 있는 요령을 깨우치게 되지 않을까.
현실이 신경 쓰이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현실을 완전히 없애버리거나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매몰된 상태에서의 압력은 높아지게 된다. 환경은 육체를 압박하고, 육체는 정신을 압박해 사유 체계가 작동할 여지를 없앤다. 계속되는 압박 중에서 발버둥 치기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현실의 저 밑바닥에 깔려,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 이 되거나 자살하는 방식으로 압사한다. 이는 매몰을 택함으로써 발버둥 치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현실을 없애버리는 행위이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 빗대어 보면 이러한 행위는 벽면에 비친 춤추는 군상의 그림자 그 자체가 됨으로써 자신의 입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침잠을 거역하고 비행에 도달하는 것은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같다. 동굴 밖에서는 불길의 따스함 또는 뜨거움이 중요하지 않다. 동굴 밖의 세계는 우리에게 시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