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거울이 참 많다. 집이나 공공화장실 세면대 앞에 놓인 거울은 나름 이유가 있다. 하지만 집을 나가기가 무섭게 보이는 것들이 또 거울이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지하철 개찰구 앞에도, 쇼핑몰 에스컬레이터 옆에도, 음식점 안에도 거울은 마치 거기에 꼭 있어야 할 명백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살다 보면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많은 거울이 익숙지 않다. 과연 거울은 편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비추고 비치는 이곳에서 우리는 거울의 역할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거울은 치장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거울을 봄으로써 사람들은 자기에게 정체성과 자의식을 부여한다. 거울을 보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고 거울로 자신을 치장하며 자의식- 즉 타인의 시선 속 나를 의식하게 된다. 거울의 이러한 역할은 최근의 과도한 외모지상주의와 맞물려 형성된 것이 아니다. 전래동화 ‘백설 공주’에는 거울이 내용 전개에 큰 역할을 한다. 비록 거울에 인격이 부여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 기능은 여타 거울들과 다를 것이 없다. 거울은 이야기 속 왕비에게 칭찬을 하며 자신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거울은 자신감뿐만 아니라 열등감을 주기도 한다. 거울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모습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느낄 때 외모지상주의는 시작된다. 외모지상주의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열등감을 완화시키는 것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과 타인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왕비의 욕심이 자신의 비극을 초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거울이라는 소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울은 이처럼 정신을 형성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거울은 시선을 육체 속에 가둔다. 시선은 곧 정신이며, 거울은 반사를 통해 자신의 시선이 육체 안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정신의 “발길질 요구”의 명목을 없앤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이 현실 속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육체로 하여금 정신을 흡수하게 한다. 그러한 흡수 과정 끝에 남는 것은 근육과 척수의 행동이다. 대뇌의 신경은 차단되고 오직 척수로부터 비롯되는 반사적 행동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좌절과 순종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육체와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그 둘이 너무나 가까이 붙어있어 애초부터 정신과 육체는 구별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을 수 있다. 침잠 상태에서 벗어나 육체 안의 공간이 확보되어 정신이 더 이상 골격에 붙어있지 않는, 이른바 ‘타자화’의 경험이 이를 증언한다. 누구든 정신이 육체에 예속되지 않는 상태를 갈구하고 있지만 그러한 욕구는 자극과 압박 속에서 쉽게 묵살되고 이는 곧 의심으로 이어진다.
침잠 상태에서 벗어나 타자화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최선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편적인 경험은 완전한 분리가 아닌 부분적인 분리이다. 그러한 부분적인 분리, 즉 정신의 육체로부터의 ‘산책’은 예술적 활동이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우리의 정신은 잠시나마 ‘나’에게서 벗어나 ‘너’가 되는 경험을 하고, 이러한 경험들이 축적되면 우리는 2인칭 시점에서 글쓰기, 회화 또는 조각의 형태로 ‘나’를 서술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울 보기’의 행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술 활동이 ‘나’를 ‘나’로써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어려운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산책’은 영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좌절적 성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단계에서 벗어나 타자화 경험을 하고 제삼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를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다. 제삼자는 ‘나’를 인식하지 않는다. 제삼자의 관점에서 ‘나’는 군중을 이루는 구성 요소로, 기억되지 않고 주목받지 않는다.
거울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게 만드는 모든 문화적, 사회적 도구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SNS는 일종의 거울로써 거울보다 훨씬 잔인하고 예리하게 사용자의 모습을 비춰 주는 역할을 한다. 외모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기도와 성격을 모두 비춰주는 그 거울은 더욱 강력하게 사람들을 끝없고 승자 없는 전쟁터로 끌어당긴다. 그런 면에서 SNS를 한다는 것은 거울을 통해 나의 시선으로 나를 관찰하는 것보다 더 지독한 일일지도 모른다. SNS에서 타인의 활동을 본다는 것은 그들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관조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SNS상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도식적으로 설명한다면, SNS는 넓고 균질한 Network가 아니라 방사형 그물이라고 할 수 있다. SNS는 오로지 ‘나’와 ‘너’들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사형 연결 상태에서 타인은 언제나 나에게 제삼자인 ‘그/그녀’가 아닌 ‘너’로 재현된다. 이러한 ‘너’의 인식은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무의식 중에 정의하며 ‘나’를 ‘너’의 관찰자 입장에 고정시킨다. ‘너’들로 둘러싸인 SNS 공간 속에서 ‘너’와 ‘너’ 사이의 관계는 간과되며, ‘너’와 ‘제삼자’ 사이의 관계는 물론 ‘제삼자’와 ‘제삼자’ 사이의 관계는 나에게 현상되지 않는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러한 인식의 부재 속에서 나는 ‘너’들을 아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로써 배타적인 위치에 자리 잡게 되며, 나의 SNS 계정으로 대변되는 나의 정신을 그 자리에 고정시킨다. ‘나’는 ‘너’ 가 보는 ‘나’로써 조각으로 존재하며, 몇백 명의 ‘너’가 각자 소유한 ‘나’의 조각들에 나의 시선은 깨진 상태로 철저히 예속된다.
그러한 조각들은 서로 붙는 법이 없다. 그리고 조각들의 도합으로 ‘온전한 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조각된 나의 정신들은 시선을 잃고 일관성 없는 발길질을 육체에게 요구한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나의 육체는 마비된 채 철저히 침잠하여 찌그러지고 마침내 평평해진다.
거울 속 자기 모습은 그저 타인의 모습과 비교를 하려 사용되는 도구일 뿐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 거울은 타인과 비교할 상대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며, 그 ‘거울 속의 나’라는 상대는 비교라는 치열한 싸움 속에서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패자가 되었을 때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승자가 되었다고 해서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의 그 승자는 더 강한 상대에게 패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더욱 비참한 심정으로 불안함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우월성 추구는 지극히 정상적인 본능이다. 하지만 거기에 비교가 더해지면, 그 본능은 왜곡되기 시작하여 사회와 우리의 시선을 갉아먹는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거울’은 그러한 비정상적인 비교를 부추겨 외모지상주의 사회라는 끝없고 잔인한 전장을 만든 주범이 아닐까. 상처뿐인 승자를 만드는, 어쩌면 승자도 없는 싸움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우리는 ‘나’를 목적 없이 들여다보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거울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용기는 내면의 거울로부터 나와야 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때로는 자신감을 얻고 때로는 반성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인간적인 거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