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6. 더 오래 빛나는 말

― 박준 시인의 ‘지금은 우리가’

by Jasmine

지금은 우리가

박 준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시인의 시는 자주 내 안의 어린아이를 불러낸다. 시인을 따라 별이 총총한 밤, 좁은 마당으로 나간다. 담벼락에 붙인 작은 평상에서 우리는 세상 둘도 없는 남매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다. 시인의 목소리는 봄밤에 어울리게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다. 시인은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마음이 말랑해진 나도 이런저런 일들을 털어놓는다. 신나고 기분 좋은 일보다는 속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좀 더 많다. 그래도 시인은 세상을 좀 아는 오빠처럼 귀 기울여 내 말을 듣는다. 눈 맞춤도 잊지 않는다.


박준 시인의 시엔 그의 유년과 청년 시절이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소년 박준 곁엔 감수성을 물려준 아버지가 있다. 배움이 짧은 시인의 아버지는 고된 노동으로 가족을 건사했다. 비가 와서 일을 공치는 날이면 술이나 유흥을 즐기기보다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경복궁이며 덕수궁으로 궁궐 나들이를 했다고 한다. 처마 밑에 앉아 기와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창때의 아버지와 어린 박준. 시인의 시집에선 사이좋은 부자가 현재형으로 살고 있다.


박준 시인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시를 읽다 보니 홀로 남은 친정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내게 감수성 대신 내가 오래 가져온 직업에 꼭 맞는 완벽주의 성향의 꼼꼼함을 물려주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유무형의 것들을 물려준다. 학창 시절, 난 서글서글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부모님을 닮아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에 서툰 게 불만이었다. 엄마가 쓰러지고 3년 넘게 투병하고 돌아가시고 나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라는 걸 뒤늦게야 알아차린다.

이제 내 곁엔 나보다 작아진 아버지만 남았다. 며칠 전 아버지 댁에 다녀왔다. 아버지 몸무게를 재는데 겨우 45kg이었다. 나보다 가벼워진 아버지. 입맛이 없어 요즘 제대로 먹지 않았는데도 나는 아버지보다 무겁다. 아버지는 하루 세끼 거르지 않고 드시는데도 워낙 소식하시니 살이라곤 없다. 그래도 자녀들, 손자들 이름 모두 기억하고 안부를 묻는 아버지가 반가워서 찔끔 눈물이 났다. 막내딸인 여동생을 보면 손자 안부와 함께 그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장군이) 안부도 꼭 묻는다는 아버지. 엄마 와병 중에 아버지는 8개월여 여동생네에 계셨다. 그때 장군이와 아버지는 절친이 됐다. 가끔 장군이를 데려와 보여드리면 서로 너무 반가워한다니 장군이가 효자, 아니 효손이다. 최근 치매약 강도를 조금 높여서인지 더 나빠진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이조차도 감사한 일인데 나는 자주 감사를 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 아둔한 우리는 계속 더, 더, 더 가지려 하고 누리려 한다. 내가 그랬다. 엄마를 잃고서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걸 누리며 살았는지 깨달았다. 그조차도 엄마의 첫 기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요즘의 일이다. 친정에서 엄마와 나란히 누워 잠들 때까지 소곤소곤 주고받던 말보다 엄마가 떠난 뒤 나에게 주문처럼 외우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나길 기도한다. 그게 바로 이곳을 떠난 엄마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는 걸 알기까지 11개월이 넘게 걸렸다. 나는 반백이 돼서도 여전히 엄마의 늦되는 딸로 살고 싶은가 보다. 첫 기일 땐 엄마가 꿈에라도 한번 다녀가면 좋겠다. 이렇듯 떼를 쓰고 싶은 나는 쿨한 딸이 될 가망은 없는 듯하다.


#박준#당신의이름을지어다가며칠은먹었다#지금은우리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4. 농담이 필요한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