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니 시인의 ‘나무 식별하기’
나무 식별하기
이제니
그 나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눈과 그 귀와 그 입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밤과 나무는 같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너는 너와 내가 나아갈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잎이 다르듯이. 줄기와 줄기가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너와 보이지 않는 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본 작은 나뭇잎이었다. 내가 나로 사라진다면 나는 바스락거리는 작은 나뭇잎이라고 생각했다. 참나무와 호두나무 사이에서.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이에서. 가지는 점점 휘어지고 있었다. 나무는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밤은 어두워 뿌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어스름과 어스름 사이에서. 너도밤나무의 이름은 참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인의 ‘나무 식별하기’를 읽다가 두 번째 문장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과연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잘 이해하고 있는가,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뒤따랐다.
60년대생인 나는 교복 세대이자 마지막 교련 세대다. 여중 시절엔 무용과 체육 시간이, 여고 시절엔 교련과 체육 시간이 무섭고 싫었다. 운동신경이 둔하고 유연하지도 못하니 매주 돌아오는 그 시간이 고역이었다. 교련 시간엔 ‘뒤로 돌아가’ 구령에 맞춰 앞뒤 사람과 발맞추는 게 되지 않았다. 항상 반 박자가 늦어 뒷사람과 엉키면서 대열이 흐트러졌다. 똑같은 복장을 하고 종과 열을 맞춰 걷다가 구령에 맞춰 뒤로 돌고, 좌로 우로 돌아가는 일은 매번 내 몸과 머릿속 방향감각의 불일치를 불러일으켰다.
일사불란함이 중요한 제복의 세상에선 개인의 성향이나 특성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었다. 지금도 각 잡힌 하얀 교련복 바지를 입고 대열 속에서 교련 선생님 레이다에 걸릴까 봐 가슴 콩닥거리며 행진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나는 Jasmine이 아니라 유사시 쓰일 간호인력으로 존재했다. 언제라도 다른 사람과 대체 가능한 존재.
그 시절의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고,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다. 그 나무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든다. 비록 나와 네가 서로 다른 나무 아래 앉아 있어도 밤은 그 다름을 알 수 없게 한다. 어두워서 서로의 표정을, 마음을 제대로 살피고 헤아리긴 쉽지 않다.
참나무와 호두나무, 전나무와 가문비나무는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른 나무다. 어둠은 그 차이를, 고유성을 분별할 수 없게 한다. 밤은 깊어가고 가지는 점점 휘어진다. 나무는 점점 땅 가까이 내려앉고 있다. 너와 나는 어스름 속에 침묵하고 있다. 그 어둠은 무지일 수도, 독재일 수도 있다. 똑같은 모자를 쓰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구호를 1초의 어긋남도 없이 외친다 해도 너와 나는 다른 존재다.
너도밤나무는 밤나무와 종도, 속도 다른데 단지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너도밤나무’로 이름 붙여진 존재다. 고유한 존재임을 부정당한 것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고유하다. 하늘 아래 같은 인간은 없다. 일란성쌍둥이들도 서로 다른 특성을 갖는 것처럼.
지금껏 우리 사회는 존재의 고유성보다는 통일성을 중시해 왔다.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되어야만 했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여자는 태어나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속한 존재였다. 60년대생들이 배움의 혜택을 받고 가정을 이뤄 MZ세대를 낳아 키우면서 우리 자녀 세대는 훨씬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됐다. 때에 따라 어딘가에 소속되기도 하고, 단독자로서 행동할 수도 있는 그들 덕분에 녹록지 않은 현실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70년대생인 이제니 시인은 고유성을 인정받지 못한 너도밤나무의 이름은 참 쓸쓸하다고 생각한다. 시인과 같은 마음으로 시의 마지막 문장에서 오래 머문다.
#교련복#체력장#고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