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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놓친 사랑이 그리워 꾸는 꿈

― 황인찬 시인의 ‘무화과 숲’

by Jasmine

무화과 숲

황 인 찬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


어제 가을비 같은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말간 하늘에서 완연한 봄빛이 느껴진다. 오늘 아침엔 황인찬 시인의 시 ‘무화과 숲’을 읽었다. 이 시를 읽다 보니 10여 년 전 무화과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친구 둘과 함께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산 중턱에 있는 다산 초당과 산 아래 마을에 있는 사의재를 오가다 영암을 지나게 됐다. 무화과 판다는 팻말이 군데군데 붙어 있는 걸 본 친구는 지금이 무화과 철이며 영암이 무화과 산지라고 했다. 우리는 작은 스티로폼 가득 담긴 무화과를 한 상자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무화과를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나는 별 기대 없이 한입 베어 물었다. 절정의 맛이 있다면 이런 맛이겠구나 싶었다. 그 천연의 단맛에 홀려 무화과 한 상자를 금세 먹어 치웠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무화과 생각만 하면 처음 베어 물었을 때의 폭신함과 달콤함이 떠올라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다음 해 9월 동네 시장에서 눈에 띈 무화과를 반가운 마음으로 샀지만 영암에서의 맛이 아니었다. 그때 이후로 무화과는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났는데 황인찬 시인의 시가 영암의 무화과를 소환했다.

무화과나무가 아닌 ‘무화과 숲’이란 제목에 먼저 궁금증이 일었다. 정말 꽃이 없는 과일일까 싶어 찾아보니 아니었다. 무화과는 꽃받침과 꽃자루가 주머니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꽃을 삼키듯 감싸는데 겉으로 꽃이 보이지 않아 꽃 없는 과일(無花果)로 불리게 됐다. 관심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우리 가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게 사람일 때는 더 그렇다. 젊은 날 누구나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 마음 지키기에만 급급해 상대를 제대로 알기 위해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내 곁에 머무는 소수의 친구들이 더 고맙고 소중하다.

시인은 쌀을 씻는 일상에서 그 옛날 숲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은 그 사람을 떠올린다. 과거의 일이지만 시인에게는 여전히 현재형인 사람(사랑)일 것이다. 시인은 저녁엔 저녁을 먹고 아침엔 아침을 먹는 일상을 살지만, 밤엔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을 꾼다고 고백한다. 무화과는 많은 것을 상징한다. 꽃 없는 과일이란 이름과 다르게 그 안에 작은 속꽃들이 달콤함을 품은 과육으로 꽉 차 있다. 놓친 사랑에 대한 그리움도 그 못지않게 응축돼 가슴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바래지 않은 그리움을 단 10줄의 시로 담담하게 풀어내는 젊은 시인이 부럽다. 나도 오늘 밤엔 혼나지 않는 꿈을 꿀 수 있겠다.


#황인찬#무화과숲#구관조씻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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