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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 송경동 시인의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by Jasmine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송 경 동

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리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년에 깊숙이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송경동 시인의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시인은 세월에 속아 주저앉는 게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요령을 터득한다.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고 지난날을 돌아본다. 실제 시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노동 현장에서 일하며 약자들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에 스민 시인의 끈기와 강건함에 자연스레 동화된다. 그래서 ‘우리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는 시인의 말에 설득되고 만다.


두 번 다시 속고 싶지 않아 생을 꺾어버리고 싶은 순간을 중년에 이르도록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44년 지기인 한 친구는 병상에 누운 친정엄마가 병문안 때마다 ‘죽고 싶다’,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세월을 20년 가까이 견뎌냈다. 그러나 친구는 한 번도 그 찢어지는 심정을 날것의 언어로 토로한 적이 없었다. 이 시를 읽는데 그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는 그토록 캄캄한 긴 터널의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가정적인 남편과 엄마 바라기인 딸 둘이 기둥이 돼 주긴 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오랜 와병 끝에 친정엄마도 돌아가시고 지난해 친정아버지까지 여읜 친구는 지난가을 만났을 때도 눈물 바람을 하지 않았다. 삶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양 끝을 바쁘게 오가야 했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함이랄까. 그것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겠지만 친구가 삶의 고통을 마주하는 자세는 내가 그 발끝에도 다다를 수 없는 경지다.


시인은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 보라는 여름의 시간이자 기회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기억도 까맣게 잊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저앉은 내게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는다는 시인. 내겐 큰딸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는 구순 넘은 친정아버지가 있다. 집안일에 손 놓은 지 오래인 나의 큰 구멍을 부지런히 메우는 남편도 있다. 알아서 독립해 제 앞가림하는 아들도 있다. 나처럼 부족한 며느리에게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시어머니까지.


지난주에는 남편 생일 축하 핑계로 제주도에 며칠 머물다 왔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카페 앞엔 바다 코앞까지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일출봉을 사진에 담다가 한쪽에 하얀 꽃이 핀 클로버 세상이 펼쳐져 있는 걸 보게 됐다. 순간 나도 모르게 네 잎 클로버를 찾느라 한낮 땡볕에 땀을 흘리다 깨달았다. 이미 지천에 행복의 세 잎 클로버가 널려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모를 행운을 찾아 기미만 얼굴에 가득 심었다는 걸.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이라는 시인의 목소리가 이제야 제대로 들려온다. 네 잎 클로버 찾느라 땡볕에 몸을 맡기는 내가 관록(貫祿)의 초록이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시인의 말처럼 여린 초록의 마음으로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을 맞으려 한다.


#송경동시인#나는한국인이아니다#먼저가는것들은없다#여름의시간#기회의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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