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 시인의 ‘마름’
마름
박 준
이제 이곳 해안에도
여름 물이 마르고
가을 찬물이 들어옵니다
보잘것없는 상대에게
한번 옮겨 간 마음은
어지간해서 다시 거두어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고 갑니다
살면서 나를 아껴준
몇몇 이들도 한번쯤
이곳을 다녀간 모양입니다 <시 전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 창비시선, 2025
이 시를 읽고 별안간 30여 년 전 여름에 다녀온 서해 변산해수욕장이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지낸 기억이었다. 여고 동창 넷이서 지척인 해운대를 두고 교통 사정이 좋지 않은 변산으로 간 건 젊음의 치기 때문이었으리라.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머릿수가 넷이라는 것만 믿고 떠난 여행은 사흘 내내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다. 한여름 해수욕장의 활기를 기대하며 내린 변산해수욕장 근처의 스산함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개발 예정지로 지정돼 가게들이 거의 빠진 데다 증축·개축도 금지된 상태였다. 우리 숙소는 일반 가정집 한쪽 구석에 세를 주는 허름한 자취방 같았다. 자물쇠도 시원찮고 방문도 덜거덕거리는 미닫이였지만 해는 기울고 주위를 둘러봐도 묘수가 없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미닫이방 문턱에 걸터앉아 문밖에 선 나와 이야기하던 친구가 반쯤 열린 미닫이문에 기댔다가 미닫이 문짝과 함께 발라당 넘어간 순간은 지금도 아찔하다. 문턱과 방바닥 단차가 10cm 정도였기 망정이지 자칫 뇌진탕으로 큰일을 치를 뻔했다. 주인집 아들인지 종업원인지 서른 즈음의 남자는 문짝을 끼우고 비스듬히 못 하나를 박아주고는 괜히 우리 방 주변을 오갔다. 신경이 곤두선 우리는 밤새 헐거운 문짝에 등을 기대거나 누워서 두 발로 미닫이문을 사선으로 밀면서 번갈아 불침번을 섰다.
다음날 채석강 구경을 하고 내소사로 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절집 근처에서 물었더니 숙소까지 20여 분만 걸으면 된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양산도 없이 한여름 오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30분이 다 되도록 아스팔트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왼쪽 팔다리가 화상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마침 지나가는 승합차를 세웠다. 숙소 위치를 말하니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라고 했다. 선심 쓰듯 부르는 금액에 두말없이 탔는데 5분여 만에 내리라고 했다. 바가지를 제대로 썼지만 지친 우리는 아무 말 못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새벽녘까지 발갛게 익은 팔다리에 계속 물수건을 번갈아 대며 열기를 빼야 했다. 30년도 더 지난 그 밤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돌아보면 우리 넷은 세상 물정 모르는 맹꽁이들이었다. 교통 상황이 안 좋은 줄 알면서도 그곳을 선택했다. 그때 하나같이 어리숙하던 친구들과는 지금도 생일을 챙기고 2, 3년에 한 번씩 해운대의 전망 좋은 숙소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옛날 왼쪽 손등과 팔다리에 화상을 입었던 기억을 나눈 것도 오래전의 일이다. 그나마 왼쪽 얼굴이 무사했던 건 손수건으로 얼굴만큼은 지켜냈기 때문이다. 대신 왼쪽 손등은 그해 겨울이 다 지나도록 거뭇거뭇 흔적이 남았다.
보잘것없는 나와 친구들, 여고 때 만나 40년이 훌쩍 넘도록 이어지는 인연. 서울과 부산이란 거리 때문에 살갑게 챙길 수도, 자주 만날 수도 없지만 오랜만에 만나면 별것 아닌 이야기에 빵 터지고 그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그래서 30여 년 전 변산해수욕장을 떠나기 전날 석양 아래 바다를 향해 걷던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걸어도 걸어도 무릎까지도 물이 들지 않는 해변에서 석양을 등지고 사진을 찍던 우리. ‘보잘것없는 상대에게/ 한번 옮겨 간 마음은// 어지간해서 다시 거두어들이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고 갑니다’라고 쓴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내 것이 된다. 그들 또한 내게 준 마음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워 보잘것없는 나를 상대해주는 것이리라.
박준 시인의 시에는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스며 있다.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첫 시 ‘지각’부터 가슴에 찌르르한 느낌이 든다. ‘미아’ ‘이사’ ‘마름’ 등 이어지는 시들은 하나같이 시인의 다정함, 그래서 자주 뒤돌아보고 오래 생각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시인의 아버지와 엄마가 시 속에 오롯이 살아 있어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게 부러워서 그의 시를 읽는다.
#여고동창#박준#변산해수욕장#마중도배웅도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