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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기도를 닮은 말

― 나희덕 시인의 ‘어떤 나무의 말’

by Jasmine

어떤 나무의 말

나희덕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10년 전엔 와 닿지 않았던 시가 가슴을 저미듯 스며든다. 지난봄은 내게 꽤 가혹한 계절이었다. 몇 개월 전부터 목과 어깨 통증으로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새벽엔 몸을 옴짝달싹 못 하고 ‘악’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상태에서 얼음이 돼 통증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다. 그 끔찍했던 몇 분간이 지난 뒤에야 뭔가 심상찮은 일이 내 목과 어깨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가벼운 통증이 시작된 건 6, 7개월 전쯤이었다. 운동량이 부족한가 싶어 그동안 필라테스를 더 열심히 했다. 그러다 맞닥뜨린 새벽녘 통증이었다.

그날 아침 정형외과로 가 MRI를 찍었다. MRI를 본 의사는 두 군데 근육의 힘줄이 찢어졌다며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이란 말에 머릿속은 진공 상태가 된 듯 더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에 귀가한 남편은 다른 전문의의 의견도 들어보자고 해 세 군데를 더 갔다. 다른 병원에선 일자목 진단까지 보태졌다. 결국 2차 병원에서 주사 치료를 받기로 했다. 수술보다야 훨씬 덜하겠지만, 초음파를 보며 주사 맞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어깨에, 팔에, 엉덩이에 주사 세례를 받고 한동안 주사실 소파 신세를 져야 했다. 이런 체력으로 수술은 어림도 없는 일 같았다. 6월 내내 병원에서 알려준 어깨 운동을 하며 동네 병원에선 목 치료를 받아야 했다. 꼬박 한 달을 체외충격파며 갖가지 치료를 받고 예정된 다른 과 검진을 받느라 흘려보냈다.


어느새 7월이 바쁜 걸음을 하고 있다. 그동안 하지 못한 일들이 숙제처럼 쌓여 있다. 글도, 시도 써지지 않을 땐 시집을 펼친다. 시집들 사이에서 내 눈에 들어온 건 나희덕 시인의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말’은 중의적이다. 말(言)이기도 하고 말(馬)이기도 하다. ‘어떤 나무의 말’은 시집 첫 장에 실린 시다. 시인은 무려 10여 년 전인 40대 후반에 이 시를 썼다. 어떤 계기로 이 시를 썼을까 헤아리며 시 속으로 들어갔다.


시를 읽으며 나는 나무가 된다. 나무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길 반복하며 60년 가까이 살았다. 혹독한 겨울에도 다가올 봄의 생기와 햇살을 추억하며 견뎌낸 시간은 나무 전체에 흔적을 남겼다.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나무는 입김도, 옷깃의 스침도 두려워한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관(棺)이 되도록 허락해달라고 ‘당신’에게 간구한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시라는 나무의 말은 기도에 가깝다. 10년 전이라면 공감하지 못했을 구절이 마치 내 안의 소리처럼 들린다.


‘어떤 나무의 말’은 치열하게 살아낸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기도로 읽힌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타고난 능력도, 든든한 배경도 없으니 그저 열심히 살았다. 이제 숨 좀 돌리고 내 천성에 맞게 조금은 느리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줄지어 왔다. 꼬박 4년을 버텨야 했다. 버텼다기보다는 챔피언과 맞붙은 복서처럼 코너로 몰려 그로기 상태에 있었다.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어깨가, 목이 심판처럼 내게 알려준다. 시인도, 나도 아직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한 게 분명해 보인다.


#나희덕시인#말들이돌아오는시간#어떤나무의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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