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양희 시인의 ‘그 겨울의 끝’
이성복 「그 여름의 끝」을 읽고
천 양 희
눈 속에서도 매화나무는
몇 구절 꽃줄기를 지켰습니다
서너차례 폭설에도 한번의 강풍에도
꺾이지 않고 눈보다 더 환했습니다
이 세상 무엇이
저렇게 눈부실까요
폭설의 한가운데 서서
매화를 보는 나의 눈빛이
오늘이 끝날인 것처럼 간절하였습니다
한그루 고결을 지키듯
매화나무 질긴 꽃들이
서너평 좁은 마음을 흰 자락으로 덮었을 때
기적처럼 나의 맹목은
끝이 났습니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창비 2024
드디어 지나갔다, 2025년이. 지나간 인연, 추억이 있는 물건들에 쉽게 등 돌리지 못하는 내가 2025년을 향해선 잘 가라고 손 흔들며 보냈다. 지난해는 사방이 꽉 막힌 교차로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갇힌 기분이었다. 드디어 새해가 내게로 왔다. 아흔셋의 친정아버지, 여든여덟인 시어머니의 일상도 안정적이다. 남편 또한 새로운 대학에서 2년간 강의를 하게 됐다. 무엇보다 회전근개 두 군데가 찢어져 내 마음과 일상을 마구 흩어놓았던 어깨가 7개월의 치료 끝에 절반쯤 아물었다. 20여 년간 번갈아 해온 요가, 필라테스도 그만두면서 빠진 근육을 되살리려면 올 한 해는 재활 운동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지난해 읽으면서 마음에 들어온 시마다 모서리를 접어놓은 천양희 시인의 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를 다시 펼쳤다. 오늘 세어보니 모서리가 접힌 시는 모두 8편이었다. 시집 한 권에서 8편이나 첫눈에 들어왔으니 풍년이 따로 없다. 인생이란 링에서 무수한 상처를 입고도 끝내 무너지지 않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제목 같았다. 삶의 고난(남편의 배신, 아들과의 생이별, 병마, 생활고 등)은 시인을 고통으로 몰아갔지만, 시인은 끝내 버티고 버텨 올해로 등단 61년을 맞았다. 쓰나미처럼 몰아닥친 고난 앞에서 무너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버텨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 그래서 시인의 시는 한 편, 한 편에 오래 머물게 된다.
시인은 이제 ‘그 겨울의 끝’에서 ‘기적처럼 나의 맹목은/끝이 났습니다’라고 말한다. 단순히 버텨낸 것을 넘어 고난의 터널을 두 다리로 지나온 사람만이 “끝이 났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겨울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던 혹독한 시간을 건너온 시인은 이제 더는 겨울에 갇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폭설 속에 매화나무 질긴 꽃들이 좁은 마음을 하얗게 덮었을 때 비로소 깨어나는 내 안의 눈이 병오년 새해를 반갑게 맞이한다. 주말 아침 체감기온 영하 13도의 한파 속을 달려오는 붉은 말의 기상이 힘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