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을 데워주는 사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친정집에서 입주 요양사(여사님)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한다. 주중에 6박 7일 머무는 분과 주말에 1박 2일 머무는 분이 아버지를 돌본다. 두 분 모두 사람을 돌보는 일에 진심이란 걸 친정에 갈 때마다 느낀다. 초기 치매인 아버지는 어쩌다 설사를 하면 요양사가 음식에 약을 탔다며 집에 가라고 할 때가 있다. 베테랑 여사님은 바로 알겠다고 아버지를 진정시킨 후 가져갈 짐이 많아서 사람을 불러오겠다고 하고는 장을 보러 나온다고 했다. 일부러 운동 삼아 조금 먼 큰 시장에 가서 장을 봐서 2시간쯤 후에 오면 아버지는 그전 일은 잊고 잠깐 시장 다녀오는 줄 여긴다고 했다.
남편이 지방에 내려간 어느 날 친정에 갔는데 아버지의 한쪽 눈 흰자가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아버지가 눈동자를 내가 앉은 쪽 반대 방향으로 돌릴 때 우연히 보게 됐는데 마치 눈알이 곧 빠져나올 것 같이 보였다. 겁에 질린 나는 운전이 가능한 남동생 부부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남동생도, 올케도 모두 일에 매여 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필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늦은 오후였다. 안과 진료 마감 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아파트에서 500m가량 거리인 안과까지 택시를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베란다 구석에 세워진 워커가 눈에 띄었다. 여사님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집을 나섰다.
집 밖을 걸을 일이 없는 아흔둘의 아버지를 부축해 병원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여사님과 나의 네 손 중 한 손은 우산을 들어야 했고 두 손은 워커의 좌우를, 나머지 한 손은 아버지를 부축해야 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니는 길이 그렇게 울퉁불퉁하고 단차(段差)가 많은지 그날 처음 알았다. 무려 20년 가까이 오갔던 길인데도 그랬다. 중간에 3번이나 벤치에 비닐을 깔고 아버지를 쉬게 하며 가야 했다. 여사님도, 나도 진땀을 빼며 20여 분 만에야 병원에 도착해 진료를 받았다. 의사는 노화에 따른 충혈과 백내장이라며 시간 맞춰 안약을 쓰라고 했다. 연세가 있으니 수술은 안 하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다시 아버지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지만 여사님과 함께 무사히 아버지를 집에 부축해 집에 왔다.
여사님은 오자마자 저녁상을 차렸다. 엄마가 안 계신 친정에선 밥이 넘어가질 않는 데다 그날은 너무 지쳐 바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다시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아버지 식사가 끝난 뒤 겨우 기운을 차려 집을 나오려니 여사님이 자기가 사서 마시는 단백질 음료를 손에 쥐여주며 이거라도 마시고 가라고 했다. 우리 집에 항상 쟁여져 있는 음료였다. 그런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여사님의 눈빛이 엄마 잃고 입맛 잃은 나를 진정 안쓰럽게 여긴다는 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라 음료를 든 채 얼른 등을 돌리고 현관을 나왔다. 내게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인 사람은 그동안 엄마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친정에 가면 여사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여사님은 에너지도 넘치고 항상 밝은 얼굴이어서 위로 받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 지난 3월 남편과 함께 갔더니 주중인데 주말 담당 여사님이 우리를 맞았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주중 담당 여사님의 남편이 돌아가셔서 급하게 중국에 갔다고 했다. 남동생 부부에게 부고를 알렸는데 우리 자매에게 공유하지 않은 거였다. 그러고 며칠 후 장례를 치른 여사님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여사님에게 위로 전화를 했더니 첫마디가 '죄송하다'였다. 나는 너무 의아해 큰일을 당하셨는데 왜 죄송하냐고 했더니 동료 요양사들에게 들은 말 때문이었다. 상을 당해도 환자 보호자들에게 말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고 했다. 솔직하게 말했다가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은 간병인들이 있다고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떻게 사람 인심이 그럴 수 있는지. 우리 삼 남매는 각 10만 원씩 부의금을 드리기로 하고 다음 날 올케가 아버지를 찾아뵈면서 여사님에게 전달했다. 여사님은 일주일 아버지 곁을 비운 것만으로도 죄송한데 부의금까지 어떻게 받냐며 사양하다가 올케의 진심에 눈물을 보이며 봉투를 받았다고 한다.
그날 이후 아버지를 뵈러 갈 때마다 여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여사님의 남편은 한국에서 아내(여사님), 두 딸과 함께 일하며 지내다 은퇴 후 고향이 그리워 홀로 중국에 돌아가 여러 해를 지내다 돌아가신 거였다. 큰딸은 한국인과 결혼해 수원에 정착했고, 작은딸은 취직해 지방에서 혼자 지낸다고 했다. 개인사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마치 의좋은 이모 조카 사이 같기도 했다. 가족은 아니지만 더 깊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여사님 덕에 친정집 가는 발걸음이 전보다 가벼워졌다. 언젠가 여사님 볼일 때문에 몇 시간 아버지를 대신 돌보러 왔던 여사님의 큰딸은 첫눈에도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깔끔하게 차린 식탁이며 깍듯한 태도가 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집 안방이 여사님의 공간이 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예전에 엄마가 현관에서 나를 맞아 주었던 것처럼 이젠 여사님이 우리 삼 남매를 맞아 주고 배웅도 한다. 엄마의 부재로 맺어진 인연이 이렇게 깊어질 줄 몰랐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자나 깨나 자식 걱정, 아버지 걱정뿐이었던 엄마가 이런 좋은 분을 친정집으로 보낸 게 아닌가 싶다. 가족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의 속내를 다 아는 존재, 아버지에게 자식보다 더 정성을 다하는 존재인 그분 덕에 자식들은 자기의 일상을 영위한다. 그래서 친정으로 가는 발걸음이 예전만큼 무겁지는 않다. 가슴으로 사람을 대하는 분을 만난 건 아버지에게도, 자식들에게도 큰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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