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매우 예민해서 생긴 일

― HSP: Highly Sensitive Person

by Jasmine

한 달 전 원정미 작가님(미국 캘리포니아 결혼가족치료사이자 미술치료사)의 글 ‘도대체 왜 맨날 피곤한 거야?’를 읽은 건 뜻밖의 행운이었다. 여행을 싫어했던 이유가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였다는 첫 문장이 꼭 내 이야기 같았다. 나 또한 그랬다. 마블링 잘 된 쇠고기며 불 피울 숯 등을 챙기는 것도 남편이 하고, 운전도 남편이 하는데 나는 여행 가방 꾸릴 생각만으로도 피곤이 몰려왔다. 여행지에 도착해 숙소에 들어서면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쉬어야 했다. 나도 원 작가님 글을 읽기 전까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저질 체력이어서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원 작가님처럼 나 또한 Highly Sensitive Person(HSP: 매우 예민한 사람)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버지의 기분을 공기로 바로 알아차렸다. 공포영화는 아예 볼 생각조차 못 했고, 중학생이 돼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표정만으로도 그 사람의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항상 부모님에게는 착한 딸이었고 사춘기도 건너뛰었다(물론 그 대가는 중년에 치러야 했다). 낯선 사람, 낯선 공간에 대한 불편감은 나이들면서 조금 나아졌지만 육식, 고기 삶는 냄새 등은 여전히 힘들다.

결혼 전 소개받은 남자들 대부분은 첫 만남부터 시각이나 후각, 기분을 자극했다. 사람에 대한 느낌보다 짙은 남색 양복에 어울리지 않는 흰색B*C 양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거나, 남성용 스킨 냄새가 역하게 느껴진다거나, 아니면 상대방의 말투나 사소한 제스처에 신경 쓰느라 정작 상대의 말에 집중할 수 없는 일이 이어졌다. 누군가의 자랑스러운 아들들에게 의문의 1패를 안길 수밖에 없었다. 신기하게도 남편은 첫 만남에서 거슬리는 게 별로 느껴지지 않은 첫 케이스였다. 그렇다고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지만 9개월 후 우리는 부부가 됐다. 남편은 지금껏 이유를 알 수 없는 나의 예민함 때문에 다양한 에피소드 보유자가 됐다.


이런 예민함은 회사 일을 할 때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인간관계에선 에너지 소모가 컸다. 나는 타인의 마음에 난 구멍을 빨리 알아챘다. 회사에서 매일 보는 동료나 후배들의 힘듦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때로는 위로를 전하고, 때로는 밥을 나누었다. 서너 곳의 직장을 거치는 동안 매번 내게 과하게 집착하는 후배나 동료 때문에 힘들었다. 그들은 내게 지나치게 의존했다. 그리고 과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찬합 가득 들고 온 동료, 과한 선물을 하는 후배, 의전원 시험에 떨어졌다고 집까지 찾아와 내 품에 안겨 우는 후배 등 점점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됐다.


그 와중에 뒤늦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문학, 심리학 수업 등을 들었고 그렇게 나를 들여다보게 됐다. 지난 4년여간 친정엄마의 와병과 별세를 겪으면서 조금 이른 퇴직을 한 게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하다. 지금은 한풀 꺾인 내 체력에 맞는 사람들과만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이 빠지지 않는 고깃집 회식이며 2차 노래방까지 갈 일이 없으니 이제야 내게 가장 편안하고 어울리는 일상을 사는 듯하다. 매일 시를 읽고, 책을 낭독하고, 가끔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 자주 웃는다. 때때로 시를 쓰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하는 지금의 일상이 HSP인 내게 딱 맞는 옷 같다.

원 작가님의 글 덕분에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30년의 직장생활 동안 나는 자주 나 자신에게 불친절했다. 술자리나 노래방 등에서 항상 좌불안석인 나 자신을 한심해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제야 매우 예민한 사람으로 태어난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다재다능한 사람이 있으면 무능한 사람도 있고, 서글서글한 사람이 있으면 모난 사람도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는 제각각의 엉킨 실타래가 있지만 그걸 잘 풀어낼 수 있는 지혜도 이미 있다. 나이 든다는 건 주름살이나 흰머리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타인에 대해, 세상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마음도 함께 커가는 거라고 믿는다.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기만 한다면, 그래서 마음을 가득 덮고 있는 잡동사니들을 잘 걷어내기만 한다면 나이 들어가는 게 마냥 두렵지만은 않으리라. 60년이나 살고 난 뒤에야 겨우 깨달았지만, 그조차도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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