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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an 23. 2021

13. 고도는 오지 않아도 꽃등심은 맛있어

결혼 후 남편 덕분에 문화생활이 윤택해졌다. 업무 연관성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음악, 연극, 뮤지컬 등 남편의 관심사는 폭넓었다.  2년 전 봄날, 남편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러 가자고 했다. 너무나 유명해서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듯싶지만, 사실 나는 책을 읽은 적도, 연극을 본 적도 없었기에 그러자고 했다. 연극을 보러 가기로 한 주말 오후, 하필이면 전날 절친들과 수다 삼매경의 불금을 보낸 데다 잠까지 설친 탓인지 목도 칼칼하고 코도 맹맹했다. 일단 집에 있던 종합감기약을 먹고 예술극장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유난히 햇살이 따사로웠다. 극장 근처 갈치조림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라테까지 한 잔 마시고 나니 봄날의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구나 싶었다. 한껏 말랑해진 마음으로 남편과 극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보니 무대와의 거리도 알맞게 가까워 좋았다. 불이 꺼지고 곧 낯익은 배우가 등장하면서 기분은 더 고조됐다. 등받이에 등을 편안하게 붙이고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고도는 오지 않았다. 낯익은 배우가 한 명 더 등장했지만, 고도는 도저히 올 기미가 없었다. 시간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갔고 드디어 쉬는 시간이 됐다. 화장실에 다녀와 복도 소파에 앉으니 엉덩이도 배기고, 약 기운이 퍼지면서 내가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지 의문스러워졌다. 20여 년 전에 이 연극을 보고도 다시 보는 남편은 이게 정말 재미있을까 싶어 표정을 살폈더니 그리 지루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아, 이제 1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되겠구나 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이어진 2부를 얼마쯤 봤는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순간, 나는 코 고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주변은 고요했고, 남편의 시선은 무대에 꽂혀 있었다. 코 고는 소리를 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아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쪽팔리는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도 없이 이런 상황을 초래한 나 자신이 너무 어이없는 와중에도 남편 표정을 곁눈질로 살폈다. 아, 그런데 이 남자,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표정으로 고도만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망신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면 내게 제대로 바가지를 긁혔을 텐데…. 연극 보다가 코 고는 아내를 옆에 두고도 태연한 척하는 남편이 고마웠다. 속마음까지야 그렇진 않았겠지만, 겉으로라도 고도가 오기만을 기다린 건 신의 한 수였다.     


연극이 끝나기가 무섭게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감기약만 먹으면 왜케 졸리지….”  지루한 연극에 반전을 일으킨 건 나였을까? 감기약이었을까?     


그날 저녁상에 남편이 좋아하는 원뿔 1등급 한우 꽃등심에 와인을 곁들였다. 비록 고도는 코빼기도 보지 못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꽃등심의 육즙이 남편뿐만 아니라 고기를 즐기지 않는 나까지 콧소리를 내게 했다. 와인잔 부딪는 소리와 함께 봄날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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