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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an 31. 2021

14. 이승욱의 <소년>, Jasmine의 <소녀>

일곱 살 1학년 운동회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래 달리기 주자로 선택돼 꼴찌로 운동장 반 바퀴를 혼자 달렸던 기억을 풀어쓴 글에, 이승욱의 <소년>에도 똑같은 운동장 장면이 나온 것 같다는 글 카페 선생님의 댓글에 얼른 책을 주문했다. 우리나라에 몇 안 된다는 정신분석가로서 이승욱을 처음 알게 된 건 2012년 즈음 <상처 떠나보내기>를 읽으면서였다. 그의 치열했던 뉴질랜드에서의 정신분석 공부 과정과 상담 사례를 담은 책이었는데 사람(환자)에 대한 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몰입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은 엄마와 나의 유착관계를 객관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 이후 그가 운영하는 ‘닛부타의 숲’이란 정신분석 클리닉을 알게 돼 가끔 사이트에 들어가 그가 쓴 글을 읽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선생님의 댓글이 그에 대한 수면 아래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검색해보니 그사이 그가 쓴 책이 꽤 여러 권이어서 반갑기도 하고,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안타깝기도 했다.      


<소년>을 펼쳐 들고 처음엔 운동장 장면이 언제 나오나 궁금해하며 읽었는데 그가 고향을 떠나 전학 간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서 이유도 모른 채 선생님의 폭력을 경험한 내용에 이르러선 어느새 70년대 내가 다닌 학교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시절 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학교 내 폭력은 지금도 여전히 뉴스로 소비되고 어린이집 등 더 어린 아이들까지 피해자가 되는 시스템을 성인이 된 후 교사로서 경험한 그는 회의를 느껴 교사를 그만두고 서른이 넘어 유학을 떠난다. 우리가 그런 무지막지한 시절을 견뎌냈구나 싶은 마음과 함께 그가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의 신체적‧정서적 폭력을 견뎌내고 정신분석가로서 소명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그와 비슷한 연배에 늦되는, ‘아주 늦되는 아이’였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다른 성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경험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평생 애(愛)와 증(憎)의 갈등을 겪었다. 사랑과 헤어짐의 애틋함뿐만 아니라 미움과 다툼의 시간으로 경쟁했던 세월도 만만치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초등 시절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혼나던 당시에 부당하다는 생각에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다 점점 화가 난 어머니로부터 집을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물러서지 않고 나가겠다고 했다가 부모가 사준 걸 몽땅 두고 나가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자기가 친구들에게 딴 딱지를 챙겨 당당히 나가야지 생각하는데 이번엔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도 벗어 놓고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오기로 겉옷을 벗어 팬티 차림이 됐다. 그런데 그마저도 벗으라는 말에 집에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성기를 보이는 게 모욕적이었음에도 어머니에게 지지 않으려고 팬티까지 벗고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분노로 속옷을 어머니 얼굴로 던졌다가 거의 죽도록 맞았던 기억, 그렇게 맞으면서도 끝까지 울음을 참으려 악을 썼던 사건을 통해 처음 ‘증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됐다고 했다.      


그 증오는 3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뉴질랜드에서 자신의 정신분석을 받으며 고스란히 올라왔고 매주 두 번 전화로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던 때였지만, 6개월 가까이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 ‘그녀’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에게 모욕을 준 여자였다는 그의 고백은 우리의 영혼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내고 흔적을 남기는 건 대부분 부모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때의 부당한 강요와 자신의 분노가 떠오르면 까닭 없고 대상 없는 살의에 가까운 뜨거움이 올라왔다는 그는 ‘어린 소년은 쉽게 상처 받고, 깊게 저장된다’고 했다.      


그의 문장은 그대로 나의 문장이 됐다. 그에게도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결핍이었듯, 어쩌면 인간은 한 인간을, 심지어 자식조차도 온전히 사랑으로 품기엔 너무 미숙하고 이기적인 존재가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뉴질랜드로 떠나는 날 공항에서 건 전화에 혹독하고 엄했던 어머니에서 한 여자가 돼 외친다. “니가 이렇게 떠날 줄 몰랐다”는 그녀의 오열에 아들은 모자간을 결착시켜 옭아매던 어떤 접착이 마법처럼 풀리는 감각을 느낀다. 어머니가 아이처럼 울고, 소녀처럼 그를 원망할 때 그는 하나의 허황함을, 허황한 여자를 본다. 어머니가 허황하다는 게 아니라 모든 여자의 허황함, 모든 인간의 허황함, 모든 인간의 소년과 소녀가 만들어낸 환상과 집착의 허황함을 느낀다고 한 지점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의 오열에 아들이 슬퍼한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여리고 아픈 소녀였고, 그녀가 그를 놓지 못하고 슬퍼한 것은 그녀의 결핍과 아픔 때문이지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었다는 그는 매정하고 냉정해져서 그녀를 달랜다. 이승욱은 소녀를 달래는 아비의 언어로 그녀를 달랜다. 그럼으로써 소년은 경계를 넘어선다.     


자식으로서 한 인간이 부모를 온전히 수용하게 되는 때가 결코 빨리 오지는 않는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울 것이다. 대부분의 화해는 부모가 상노인이 되거나 소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가 가까워서야 이뤄진다. 때로는 부모가 자연 소멸함으로써 종료되기도 한다. 그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간 어머니. 평생을 증오로 매달리고 애정으로 도망가려 했던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내가 ‘고아’가 됐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제야 그는 어머니를 향해 자그맣게 손을 흔든다. [허황한 여자, 내 어머니를 그렇게 보냈습니다. 이제 소녀는 더 이상 없습니다. 소년은 그녀를 무척이나 깊게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나는 이제 내 안의 ‘소녀’를 넘어서는 그 고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내가 엄마를, 여리고 미성숙한 한 소녀를 진정으로 어루만지고 달랠 수 있기를, 그래서 그 소녀를 진정 엄마의 자리로 온전히 모셔올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기도가 이뤄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소녀 Jasmine이 여인 Jasmine으로 거듭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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