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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ul 03. 2021

15. 문외한이 살아가는 법

새로운 시대를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막 30대에 접어든 19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외환위기가 우리나라를 덮치기 전, 나는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할 줄 몰랐다. 내 인생 체감 시계는 더딘 지적 성장만큼이나 여유롭게, 아니 느리게 흘러갔다. 눈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 줄도 모르고 아무런 대책 없이 30대를 맞고도 여유만만하던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일이 터졌다. 

     

입사 4년 차에 업무도 어느 만큼 익숙해지고 긴장감은 그 이상으로 떨어져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부서장이 알려준 회사 방침은 봄날의 천둥번개 같았다. 회사에 곧 컴퓨터 시스템이 도입되고 모든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하게 된다는 공지에 나를 포함한 부서원 모두 얼음이 됐다. 40대 선배들은 사색이 됐고, 기계치인 나 또한 선배들 못지않은 공포를 경험했다.      


그 공지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운관 TV 같은 컴퓨터가 모든 동료의 책상에 설치됐다. 뒤이어 컴퓨터 업무 시스템을 만든 업체 사람들이 프로그램 사용법을 강의하러 온다는 날짜와 시간표가 붙었다. 그때까진 2주가량의 시간이 있었다. 그 사이 눈치 빠른 동료들은 아래아 한글에 들어가 옆 사람 기죽이는 속도와 자판 소리를 내며 한글 문서 작성 연습을 했다. 그 속도와 소리에 지레 놀란 나는 그 변화의 파도 속에 나 혼자 낙오될 것만 같은 생존의 위기를 느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느린 줄만 알았던 내 머릿속도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외에 생각이 미쳤고 곧바로 컴맹인 내게 컴퓨터를 속성으로 가르쳐줄 사람을 수소문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회사 동료들에겐 비밀로 하고 컴퓨터 능력자를 찾느라 더 품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기억을 더듬다 보니 아날로그적 감성을 공유했던 그 시절 동료들이 더더욱 그립다.)       


드디어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집에 있는 중고 컴퓨터로 도스에 대해 과외를 받았다. 과외 첫날, 내게는 외계어 같기만 한 도스 부호들을 보며 앞으로 과연 회사 생활을 해낼 수 있을지 꽤 심각한 고민의 밤을 보냈다. 그러던 중 사내 업무 시스템 교육이 시작되기도 전에 컴퓨터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한 선배가 사표를 냈다. 40대 중반의 선배였다.      


시간은 흘러 드디어 강의 날이 됐다. 컴퓨터 프로그램 업체 사람에게 강의를 들으며 느꼈던 어이없음은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건 도스 시대를 뛰어넘은 새로운 체계였고, 우리 업무와 관련한 기술(?)은 그리 복잡한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서워 사표를 낸 선배가 한없이 딱하고 안타까웠다. 그러고 1년 남짓 후 외환위기가 덮쳤고 그런 상황에서 1년쯤 뒤 나도 명예퇴직을 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이젠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 시대에도 난 내가 가진 역량에 비해 약간의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됐다. 지레 겁먹지 말자, 일단 경험해 보자, 그만두거나 도망가는 건 경험해 본 뒤에 해도 된다는 믿음 한 자락이 생긴 까닭이다. 심지어는 예상치 못한 팀장 승진 발령에 지레 겁먹고 회사에 인사 철회를 요청하려는 친구에게 호언장담을 하기까지 했다. 일단 한번 해보라고, 해보고 정말 못하겠으면 그때 그만둬도 늦지 않다고 말이다. 20여 년 전의 경험 덕분이다. 그만두는 건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두자. 일이든, 관계든 말이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의 시대에 맞닥뜨린 코로나19 팬데믹의 터널을 1년 넘게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지금은 옛날의 그 믿음이 아직도 유효한지 자문하게 한다. 그래도 다행한 일은 여전히 회사는 돌아가고 있고, 내 자리를 AI에 뺏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동료들 또한 회사에 꼬박꼬박 출근하고 있다. 20세기에 내 생애 초유의 외환위기를 겪고도 지금껏 잘 살아왔듯이 21세기의 코로나19 팬데믹 또한 동료들과 함께, 친구들과 함께, 가족과 함께 어떻게든 견뎌낼 것이다. 그리고 훗날 언젠가는 이 시절을 또 다른 극복의 경험으로 기억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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