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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ul 10. 2021

16. 타인이 아닌 나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

나를 먼저 돌볼 수 있어야 남을 돌볼 힘도 생겨요

10여 년 전의 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밴댕이형’ 인간이 아닌 ‘넓은바다형’ 인간으로 변신했다. 그때는 그게 사적인 ‘나’에서 공적인 ‘나’로 변신하는 거라고 여겼다. 마치 화장으로 얼굴의 잡티를 가리고 출근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몇몇 후배는 나를 친언니만큼, 때로는 친언니 이상으로 나를 좋아했다(사랑한 게 아니라).   

  

그중 한 후배는 유독 나를 자주 찾았다. 그것도 자기가 힘든 순간에. 도움을 청하는 아픈 사람, 같은 직장에서 10년을 함께한 후배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후배가 나를 찾을 때마다 때로는 따뜻한 밥상을 차려서 마주 앉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밥을 사곤 했다.    

  

그런 관계가 몇 년 이어지면서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패턴의) 말만 한다는 걸 알았다. 애정 결핍인 사람은 항상 자신이 사람들에게 차별받는다며 억울함을 토해낸다. 다만 자신을 차별하는 대상이 부모였다가, 회사 상사였다가, 모임의 친구들로 달라질 뿐 그가 하는 말은 거의 똑같았다. ‘사람들은 나만 미워해’하며 눈물 흘리는 후배를 토닥이면서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위로만 해줘야 하는 걸까?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실패의 경험이 뼈에 사무친 사람은 어떤 일을 앞두고 지레 실패할 것을 걱정한다. 시험이든, 취업이든, 연애든 모든 일에서 행운이 자신을 비켜 갈 거라는 걱정을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한다.      


지인은 사소한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무나 부러워했다. 자기에겐 일어나지 않는 행운이 왜 다른 사람들에겐 자주 일어나는지 모르겠다며 시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내가 보기엔 그 지인이야말로 진정한 행운아였다. 특출난 경력도 없는 중년의 나이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사의 정규직이 됐으니 말이다.


또 다른 지인은 만날 때마다 ‘아, 옛날이여’를 반복했다. 그 자신의 과거를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시절로 묘사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어느 만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IMF 여파로 직장을 잃은 상태에서 지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다 운 좋게 서울에서 고용이 안정된 회사에 들어간 사람이, 지방에서 어렵게 살던 시절을 진심 어린 표정으로 그리워할 땐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시 더 이름값 높은 직장으로 옮겨간 그 또다시 그전 직장을 그리워한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과거를 ‘리즈 시절’인 듯 추억하는 게 그의 패턴이었다.      


한때 ‘사다리 타기 게임’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간식 내기를 할 때 사람 수에 따라 번호를 정하고 사다리를 타고 맨 위로 올라가면 누군가는 반드시 간식비를 내야 한다. 그 상황에서 혹시나 사다리를 잘못 탄 건 아닌가 싶어 정해진 번호에서 다시 출발해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 사람들이 어떤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걸 1단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2단계에서 어떻게 행동할지가 패턴화돼 있다는 걸 주변 사람들의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면서 알게 됐다. 즉 내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생각의 패턴에 따르게 되는데 그 생각의 회로가 긍정적으로 흐를지, 부정적으로 흐를지에 따라 행동의 양상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업무적으로 실수를 했을 때 바로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는 사람이 있다. 그 행동 패턴은 왜 변하지 않을까. 그건 그들의 생각의 회로가 마치 사다리 타기의 경로처럼 이미 패턴화돼 있기 때문이다. 명상 수업을 하면서 왜 유독 피해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내 주변에 많은지를 깊이 들여다봤다. 그건 넓은바다형 인간으로 분장한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내가 그리 포용력 큰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내 포용력 이상의 친절을 베풀면서 내가 얻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실제의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품을 빼고 실제 내 그릇의 크기만큼만 평가받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신기하게도 내 주변도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누울 자릴 보고 발을 뻗는다. 내가 더 이상 넓은바다형 인간이 아니란 걸 용감하게 드러내자 옥석이 가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은 남았고,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만 하던 사람들은 서둘러 내 주변에서 사라졌다. 이 변화는 내 생각의 변화와 그에 따른 내 행동의 변화로 일어났을 뿐 내게서 사라져 간 사람들이 만들어준 건 아니었다.      


“지금 당신 옆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당신의 시간을, 돌봄 에너지를 쓰려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지요? 당신은 주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받기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랑이든 위로든 일방통행일 때보다는 양방향일 때 더 시너지를 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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