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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Aug 08. 2021

20. 신출내기 영양사 인생을 맛보다

조리원 여러분 덕분에 인생을 배웠어요

3어느새 직장생활 33년 차가 됐다. 첫 직장은 대입 기숙학원이었는데  조리와 영양학을 글로만 배운 상태에서 덜컥 영양사로 합격을 했. 출근을 며칠 앞두고 오리엔테이션을 겸해 시 외곽에 있는 학원을 둘러보러 간 날의 기억은 30년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생생하다. 산속에 나지막이 자리 잡은 학원은 절집 풍경을 연상시킬 만큼 고즈넉했다. 내가 방문한 때가 수업 시간이었기에 학생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더 그랬다.      


15명의 베테랑 조리원들을 통솔해야 하는 일은 학생 티 겨우 벗은 내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걸 출근도 하기 전에 알게 한 사람은 중년의 조리원이었다. 이미 그전의 영양사가 조리원들과의 기싸움에 두 달을 못 채우고 불명예 퇴직을 한 터였다.      


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을 가로질러 영양사 사무실을 둘러보고 그 옆의 주방으로 들어섰다. 점심때가 막 지난 터라 주방에선 조리원들이 설거지를 하느라 바빴다. 싱크대서 세제로 식판을 씻는 사람, 헹구는 사람, 성인 5명이 들어갈 만큼 큰 국솥에 호스로 물을 뿌리는 사람 등 주방은 물소리, 식기 부딪치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먼저 조리원들에게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건넸지만 내 작은 목소리는 소음에 묻혀 아무도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이번엔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조리원들에게 새로 일하게 됐다며 인사를 건넸지만 나를 반기는 표정을 찾을 순 없었다. 거부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받으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들어선 문과 반대편 쪽 식당 건물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나가려 발걸음을 옮기며 한 사람, 한 사람 가까이 다가가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주방 한가운데 큰 솥 앞을 지나치며 솥을 씻는 조리원에게 인사를 건넬 때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구두를 신은 내 오른발을 흠뻑 적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얼른 “아이고, 어쩌나”하며 미안해하는 듯했지만 내가 느끼기엔 의도적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직감보다 이성에 따르는 데 익숙한 나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서둘러 주방을 빠져나왔다.   

   

조리실 안내를 맡았던 기획실장은 식당 건물 밖을 나와 사무실 건물로 나를 데려가 수건을 건네주며 조리실 상황을 설명해줬다. 학생들에게 새벽밥을 먹여야 하는 기숙학원의 특성상 새벽 4시 반에 출근할 조리원 구하기가 만만치 않아 기숙사도 제공하고 임금도 더 지불하는 데도 조리원들의 위세가 드높다고 했다. 직전 영양사도 그런 조리원들을 정석대로 통솔하려다가 오히려 조리원들의 담합으로 나가게 됐다며 배경 설명을 해줬다.     

 

조리원 대부분은 내 엄마뻘 나이였고 가장 젊은 조리원이 30대 후반이었다. 그런 조리원들을 신출내기인 내가 이끌어간다는 건 구두를 신고 자갈길을 달려야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 걸까. 어쩌면 용기라기보다 직장생활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또 취업이 간절했기 때문에 덜컥 잘해보겠다는 답을 기획실장에게 다짐하듯 건넸다.       


그렇게 아침 6시 반에 집을 나서 통근버스로 기숙학원이 있는 시외로 출근을 했다. 전공을 살려 취직했다는 데 도취해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영양사가 없는 2주 정도의 기간에 목소리 큰 조리원 두어 명이 정한 대로 식사가 제공됐다. 냉장고는 무계획적으로 주문해 놓은 식재료가 가득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를 골라내고 제철 재료와 육고기 등을 골고루 안배한 식단을 짜 일주일여 만에야 겨우 Jasmine표 식단을 붙일 수 있었다.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하면 저녁 8시가 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두 학원에서 먹고 퇴근하는 일상이 익숙해질 즈음, 직원들 신상 파악에 들어갔다. 새벽 조와 오후조로 나뉜 A, B조의 조장은 모두 지역의 명문여고 출신이었다. 50대인 그들은 명문여고 출신이란 자부심과 조리원으로 일한다는 자괴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게 어린 내 눈에도 보였다.   

   

어느 날, 새로 학원에 아이를 맡기러 온 학부모가 식당을 둘러보러 왔다. 수강 등록을 한 부모들의 당연한 순례코스였다. 그런데 학생 어머니가 마침 A조 조장의 여고 동창이었다. 한쪽은 놀라고, 한쪽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동창생을 주방에서 만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학생 어머니와 주방에서만은 동창생과 조우하고 싶지 않았던 A조 조장은 식당 한쪽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 장면을 보는데 왜 가슴이 아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얼른 정신을 차렸다. 사무실에 있던 예쁜 커피잔에 커피를 타 테이블로 가져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학생 어머니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조리장님 덕분에 학생들 식사 만족도가 아주 높아요. 자녀분 안심하고 맡기셔도 됩니다.” 그 순간 학생 어머니가 “아, 조리장이구나” 하며 장단을 맞춰줬고, 아주 짧은 순간 A조 조장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날 이후 A조 조장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미스 J에서 영양사님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동료애로 끈끈해졌고, 자갈길을 걷는 것 같던 영양사 생활도 조금씩 적응이 돼 갔다. 그때만 해도 월급을 영양사가 일괄 수령해 조리원들에게 사인을 받고 전달하던 시절이었다. 명문여고 출신들은 멋있게 영어로 사인을 했고 배움이 짧은 조리원들은 볼펜을 쥐는 것부터가 서툴렀다. 그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한 달, 두 달이 흐르자 다양한 사연을 가진 조리원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식재료를 주문하면서 내가 마실 우유와 함께 조리원들에게 줄 우유를 주문했다. 물론 개인 경비였다. 나 혼자만 우유를 마시는 게 엄마뻘인 조리원들에게 왠지 모르게 미안해서였다. 조리원들은 우유 한 팩에 너무나 고마워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된 원장님의 배려로 그 당시로썬 적지 않은 돈을 판공비로 받게 됐다. 판공비를 받은 후엔 조리원들의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가 준비한 사소한 생일선물에 그들이 그렇게 감동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들의 반응에 내 가슴이 더 뭉클해지곤 했다.


그렇게 15명의 베테랑 조리원과 신출내기 영양사는 2년을 넘기고 3년째를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조리원이 사색이 돼 달려와 공장에서 일하는 아들이 프레스기에 손가락을 다쳤다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마치 내 손가락이 잘리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웠다. 병원 이름을 확인하고 서둘러 그녀를 조퇴시켰는데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침 다음 날이 휴일이었기에 조리원 아들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병실을 찾느라 병원 복도를 걷던 때의 두려움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할 만큼 20대의 중반의 내게 그 일은 버거운 일이었다. 뉴스로만 접하던 사고를 당한 아들을 둔 엄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두렵기만 했다.      


다인실 병실 앞을 서성이던 중 병실 안에서 나를 먼저 발견한 조리원이 마치 힘든 순간 자기편을 만나기라도 한 듯 한달음에 뛰어나왔다. 다친 아들을 둔 엄마 앞에서 어이없게도 내가 먼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울음을 겨우 참고 있던 조리원과 나는 서로 두 손을 잡고 울었다. 그땐 그 눈물의 의미를 몰랐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 비록 연령대가 다르고 하는 업무가 조금 다를지라도 우리는 하루 세 끼를 함께 먹는 식구였다.      


울음이 잦아든 뒤에야 손가락 봉합 수술이 잘 끝났다는 걸 알았다. 갓 스물을 넘긴 아들의 손가락에 후유 장애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조리원에게 봉투를 건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병원비 걱정이라도 덜어주는 길밖에 없었다. 기획실장에게 보고해 학원 측이 지원한 돈에 내 마음을 보탠 봉투를 받아 든 조리원은 고맙다며 또 눈물을 흘렸다.      


15명의 조리원과 다양한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4년을 일했다. 그 시간은 이력서에 단 한 줄로 남겠지만 아르바이트 한번 시도하지 못했을 정도로 겁 많고 요령 없던 20대의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준 시간이었다. 그 뒤 전혀 다른 업종의 일을 하게 되고, 다시 서울로 직장을 옮겨오면서 그들과의 인연은 끊어졌지만,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세상 물정 모르는 신출내기 영양사에게 마음을 열어준 그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 한번 대접하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걸린다.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을 그분들이 젊은 날의 수고로움 덕에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계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감사했어요, 조리장님들^^. 당신들은 음식만 만든 게 아니라 철없던 저를 진심으로 품어주고 성장시켜주셨습니다. 그 덕에 지금의 제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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