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smine Aug 15. 2021

21. 최선이 다가 아니야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괜찮아

요가 수업 첫날의 광경은 10여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수강생 모두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았고 몸은 하나같이 나무토막 같은 사람들이었다. 회사 노조에서 직원 건강을 위해 강사를 섭외하고 회사 지하의 자투리 공간을 요가실로 쓸 수 있게 해 줬다. 요가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목, 어깨, 허리 어디 한 곳이라도 결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에 그 열기만큼은 수능 대비 수업 못지않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유연함이 느껴지는 몸매에, 가만히 있어도 웃는 듯한 눈매를 가진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10여 명의 동료와 함께 양반다리를 한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그 자세조차도 목, 어깨가 굳은 40대 전후의 초보들에겐 쉽지 않았다. 그 자세에서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하나, 둘, 셋, 내쉬면서 하나, 둘, 셋을 셌다. 그러나 세상 태어날 때 했던 복식호흡을 잊은 지 오래인 나는 숨을 단전으로 끌어내리는 것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음은 좌우로 고개 돌리기, 이어 360도 목 돌리기를 하는데 벌써 여기저기서 신음이 새 나왔다. 이어서 전굴(前屈) 동작을 위해 다리를 앞으로 쭉 펴고 상체는 바닥과 90도를 만들며 곧추세워야 하는데 단전에 힘이 없으니 절로 허리가 뒤로 동그랗게 말렸다. 중년의 수강생들은 그런 상태에서, 아랫배를 허벅지에 붙이며 가슴과 얼굴을 차례로 무릎, 종아리, 발목을 향해 폴더처럼 접는 선생님의 시연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선생님의 시연에 이어 수강생들도 허벅지와 무릎을 향해 상체를 접어야 했는데 마치 뒤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몸은 무릎 근처도 못 가고 허공에서 끙끙대기만 했다. 그때 선생님의 한마디 “각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초급 과정 내내 제일 인상적인 문장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수업을 들었지만 그 어떤 선생님도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없었다. 숨이 턱에 찬 내게 하나같이 더, 더, 더를 외쳤다. 그런데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라니… 그 문장 덕이었을까, 그 뻣뻣한 몸으로 나는 요가에 빠져들었다.      


50분의 수업 동안 내가 한 거라곤 고개 돌리기, 전굴(폴더가 아닌 10도 정도 숙이기), 측굴(側屈·이 또한 10도 정도 기울이기), 몸통 비틀기가 전부였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동안은 내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근육들이 앞다퉈 존재감을 드러냈다. 선생님 주문대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했으니 어느 한 동작도 선생님의 완성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주 조금 앞으로, 옆으로, 뒤로 겨우 시늉만 하듯 움직였을 뿐인데 마치 몸살이라도 난 듯 통증이 온몸을 들쑤셨다.      


그렇게 주 3회 수업을 2주 정도 했을 뿐인데 여고 때부터 20년 넘게 나를 괴롭히던 체증(과 그로 인한 편두통)이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했다. 체증에서 벗어나자 얼굴색이 달라졌고, 몸도 가벼워졌다. 내 몸에 촘촘히 박힌 근육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하는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즐거웠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근육, 더 깊숙한 곳의 근육들을 움직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순간들이 경이로웠다.     


내 몸을 제대로 알아가는 기쁨,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그 움직임의 폭을 조금씩 키워가는 즐거움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행복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 현재의 내 몸을 통해 과거의 나를 만나고, 어디서부터 스텝이 엉켜 버렸는지를 알아차리는 일, 거기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쌓인 불화를 하나씩 풀어내는 일이 바로 요가였다. 그렇게 나는 체증에서 벗어났고, 요가 초보 그대로의 나로서 행복했다.      


요가 덕에 모두가 한 방향을 향해 앞다퉈 달려 나가는 삶의 운동장에서도 나만의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됐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체증은 바로 남들의 속도에 나를 끼워 맞추려는 데서 온 멀미 같은 것이었다. ‘최선’이 모두에게 ‘선’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았다.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서 나를 찾는 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여유를 만끽하는 일이 바로 요가였다.


작가의 이전글 20. 신출내기 영양사 인생을 맛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