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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Aug 22. 2021

22. 40대, 나를 찾아 떠난 여행

-인도 여행이 준 선물

10여 년 전 요가를 만나고 명상을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누구의 딸 Jasmine도, 어디에 소속된 Jasmine도 아닌 오로지 ‘나’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열망이 뒤따른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열망을 연료 삼아 생애 처음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첫 여행지로 떠올린 곳은 인도 오로빌. 인도 사상가가 설립한 생태공동체였다. 무소유, 무관료 사회를 지향하는 실험이 이어져 온 오로빌은 Jasmine으로 새로운 삶을 계획하려는 상황에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로빌은 패키지여행이 불가능한 곳이었다. 인도 뉴델리에서 첸나이를 거쳐 택시를 전세 내 인적이 없는 길을 남성 기사와 단둘이 3시간쯤 가야 하는, 아주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가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사실을 알려준 지인의 조언으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안전한 여행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그렇게 패키지 북인도 여행을 선택했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 해외여행(패키지이긴 했지만)은 처음이었다. 나처럼 안전제일주의자에겐 엄청난 도전이었다. 여행을 앞두고 설렘과 두려움은 두 개의 풍선으로 경쟁하듯 부풀어 올라 출발 전날은 거의 밤을 새웠다. 드디어 인천공항에서 가방을 부치다 나와 같은 패키지여행을 선택한 50대 싱글 여성을 만났다. 그녀가 준비해온 김밥을 함께 먹으면서 두려움의 크기는 줄어들고 설렘은 커졌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방을 쓰게 됐다. 그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도 남미까지 웬만한 해외 패키지여행은 모두 다닌 여행 베테랑이었다. 혼자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과 호텔 방을 공유해본 그녀는 나와 방을 쓰게 된 걸 행운이라며 반겼다. 같은 싱글인 데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성향을 단박에 알아본 거였다.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동행이 생긴 건 내게도 다행한 일이었다.  

    

드디어 뉴델리 공항에 내렸다. 그런데 매캐한 냄새가 내 코와 목을 자극했다. 아, 인도는 70년대 우리나라처럼 매연이 일상적인 나라였다. 공항을 벗어나기도 전에 목이 따끔거리고, 코에 싸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재채기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알레르기 비염을 달고 살던 나는 바로 오로빌리언이 되기를 포기했다. 한국에 있을 때 몇 개월간이나 오로빌에서의 삶에 대해 설계하고 허물고를 열두 번도 더한 것에 비하면 포기는 너무나 빨랐다. 스스로도 어이없어 헛웃음이 났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알차게 인도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인도를 보는 것이, ‘흘낏’이라도 한번 보는 것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보는 것보다 낫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 마음속에 콕 와서 박힌 순간은 바라나시 힌두대학교 내 힌두사원(비슈와나트)을 방문했을 때였다. 35도가 넘는 더위 속에 사원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덧버선을 신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사원 안에 첫발을 디뎠는데 서늘한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순식간에 머리 위까지 전해졌다. 마치 다른 계절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게 바로 상서로운 기운이란 걸 알아차린 건 힌두사원 내엔 에어컨이 없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난 뒤였다.    

  

가이드를 따라 사원의 계단을 오르다 계단참 벽에 걸린 그림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그 멈춤은 어쩌면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수 있었지만, 나는 아주 짧은 순간 영원을 경험했다. 크리슈나를 마부로 선택한 아르주나가 마차를 타고 전쟁터로 달려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글로만 배웠던 경전(바가바드기타) 속 내용들이 몸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크리슈나는 세상을 지키는 신 비슈누의 화신이었다. 전쟁터에서 사촌 형제 등 친척들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아르주나가 크리슈나와 나누는 대화가 핵심인 바가바드기타. 크리슈나는 ‘다르마’(의무·소명)를 설명하며 이를 달성함으로써 신에게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데 그림은 그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친척들과 전쟁을 하지 않으면 나라를 잃게 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친척들을 죽여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아르주나.      


아르주나는 바로 나였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나는 엄마와 분리가 되지 않은 채였다. Jasmine으로 홀로 서려면 엄마와의 유착에서 벗어나야 했고, 그러려면 부족한 딸에게 헌신적으로 사랑을 쏟아부은 엄마를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엄마와 분리돼 Jasmine으로 사느, 엄마딸로서만 사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진 내게 그림 속 크리슈나는 말했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행위(소명)를 하라고. 주어진 삶의 의무를 다하되,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 결과에 집착하면 행위를 피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말이었다.  

   

그걸 누군가는 채널링(인간과 다른 차원의 존재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상호 영적 교신(靈的交信) 현상)이라고 했다. 간절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 마치 동아줄이 내려오듯 그 순간 꼭 필요한 지혜를 듣게 되거나 조력자를 만나게 되는 일.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했을 그런 천우신조의 느낌.      


다음 날 새벽 갠지스강에서 보트를 타고 디아(꽃과 작은 촛불이 담긴 접시)를 띄워 보내면서 소원을 빌었다. 그렇게 갠지스강에 아이 같은 나, 어리석은 나를 흘려보냈다. 디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아주 먼 곳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봤다. 갠지스 강가의 화장터에서 각각 세 점의 불빛으로 타는 세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한 인간의 생애란 얼마나 많은 고통과 기쁨, 슬픔, 분노의 용광로였을까. 그러나 마지막은 겨우 한 점 불빛이었다.      

그때 떠오른 문장.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겠다. 내게 허락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눈앞의 현재를 저당 잡히지는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렇게 현재를, 오로지 미래를 위한 불쏘시개로만 썼던 어리석은 ‘나’는 디아에 담겨 갠지스강에서 소멸했다. 그때 툭 떨어진 눈물은 내 손으로 떠나보낸 어리석은 나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새롭게 우뚝 설 Jasmine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야 ‘엄마의 딸’ 역할보다 Jasmine으로서의 홀로서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말을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중 내내 새벽 출근하며 바쁘게 살았던 내게 즐거움과 여백을 선물했다. 고전 공부를 시작했고 공부 모임을 만들었다.


내가 홀로서기를 선택하자 엄마는 한동안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엄마는 내가 소개한 요가를 시작했고, 노래 교실에도 등록했다. 내가 견고한 가족, 모녀간의 울타리에서 빠져나오자 엄마의 노년엔 또 다른 생기가 돌았다. 요가반, 노래교실에서 엄마를 형님, 아우라고 부르는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관계의 확장은 작은 울타리를 해체하면서 이뤄졌다. 내가 딜레마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작은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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