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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Jul 31. 2021

19. 욕심이 없다는 착각

― 내가 욕심이 없잖아.     ― 리얼리?

내가 갖지 않은 어떤 성향을 유난히 많이 가진 사람은 짧은 만남에서도 굉장히 깊게 각인된다. 오래전 A가 그랬다. 네 사람이 모인 자리였다. 다양한 메뉴를 자랑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라 메뉴를 고르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각자 정한 메뉴가 하나씩 나왔는데 A는 자기 앞에 놓인 접시보다는 다른 사람 접시에 더 관심이 많았다. 마침 내 접시에는 A의 접시에 없는 생크림을 덮어쓴 구운 감자가 사이드로 나왔다. 나와 다른 메뉴를 시킨 A의 접시에는 버섯구이가 먹음직스럽게 세팅돼 있었다. A의 눈은 자기 접시에 없는 다른 사람의 사이드 메뉴, 특히 내 접시의 구운 감자에 꽂혀 있었다. 애도 아닌 어른이 남의 밥그릇을 그런 눈빛으로 보는 상황을 맞닥뜨린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 눈빛을 외면하고 구운 감자를 맛나게 먹을 만큼 식욕이 나지도 않았다. 혹시 감자 좋아하냐는 내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A에게 감자를 가져가게 했다. 기다렸다는 듯 재빠른 A의 손놀림에 내 접시는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쪽이 비워져 휑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른 후 A의 동료로부터 그의 식탐에 대해 듣게 됐는데 예전에 A와 함께했던 식사 자리의 풍경이 어쩌다 빚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어떤 한 장면은 그 사람의 많은 부분을 유추하게 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A의 식탐은 단순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제자매가 많은 데다 오로지 아들밖에 모르는 모친은 A의 몫을 챙겨주기는커녕 오히려 ‘뭔 계집애가 그렇게 많이 먹냐’고 지청구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A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착한 딸로 주는 대로 먹고 엄마의 사랑을 기대하거나(물론 그렇다고 사랑받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아니면 전투적으로 자기 몫을 챙기거나. A는 그중 후자를 택했다. 어린 시절 음식을 갈구하던 경험은 먹거리가 흔전 만전인 오늘날에도 식탁 앞에만 앉으면 A 자신도 모르는 새 오빠 밥그릇을 먼저 살피던 쌈닭 같은 여자아이로 돌아가게 했다. A의 잘못된 식사 예절을 한번 경험한 사람들은 점점 그녀와의 식사 자리를 피하게 되고 A의 오랜 음식에 대한 결핍은 먹거리를 넘어 사람(친구)에 대한 갈구로 확장됐다. 문제는 그런 과도한 식탐이 어떤 나비효과를 부르는지 A 자신만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양한 형태의 욕구를 갖고 있다. 자기가 어떤 욕구를 가졌는지를 아는 건 삶을 살아가는 데 꽤 유용한 나침반이 된다. 한때 대식가였던 나는 식욕이 삶의 의욕과 동의어인 줄 알았다. 오래전 ‘큰 일꾼, 큰 사발’이라는 사발면 카피가 있었다. 나는 많이 먹는 만큼 일도 열심히 잘한다고 믿었다. 그땐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는데, 위가 음식물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하고, 장에서 영양을 흡수하지도 못한다는 걸 반복되는 체증과 위하수증 진단으로 알게 됐다.      


체증을 고치기 위해 수영, 스쿼시 등 다양한 시도를 하다 요가를 만났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요가와 함께 명상으로 나를, 나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됐다. 내게 필요한 건 많은 음식이 아니었다. 내가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주변의 높은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폄훼를 멈추는 것, 그래서 나 자신을 제대로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 쉽지 않은 과정을 회피하고 미루려는 아이 같은 나와 직면하면서부터 식사량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 과정은 요가를 시작하고 6개월여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다. 처음엔 습관적인 체증에서 벗어났는데 적게 먹어도 영양 흡수율이 높아지니 몸은 더 건강해졌다. 6개월이 지나자 주변에서도 내 변화를 알아차릴 정도가 됐다. 삶의 기적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아니었다. 생기 없는 삶에서 죽음(기대치에 부응하려는 나를 떠나보내는 것)을 삶의 한 부분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자 활기찬 일상이 펼쳐지는 행복한 아이러니를 경험했다. 그 시절 많이 들었던 말이 “무슨 좋은 일 있어?” “요즘 연애하지?”였다.   

    

그 경험 이후로 내 욕구를 잘 알게 됐고, 나를 알아갈수록 제대로 사랑하게 됐다. 가짜 식욕에서 벗어나면서 내 안에 있는 좀 더 상위의 욕구를 알아차렸다. 요가와 명상을 통해 내 안에 식욕과는 다른 차원의 강력한 욕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타인과 연대해 더 큰 성장을 이루고 싶은 욕구, 바로 사랑과 소속의 욕구였다. 그 무렵 요가명상학과에 편입해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한 번은 모임이 끝나고 집 방향이 같은 친구와 2호선을 탔는데 둘 다 대화에 몰입해 내려야 할 역을 한참이나 지나쳐 2호선을 꼬박 한 바퀴 반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난 절친들의 애정 어린 너지(nudge: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 덕에 의식의 확장을 경험한 것처럼 내가 스스로 충만할 때 내 옆의 누군가도 그 기운을 읽고 동참하게 된다는 걸 경험했다.      


그 모임을 통해 내가 사랑과 소속의 욕구와 존경의 욕구(인정 욕구), 더 나아가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사람이란 걸 서서히 알아갔고 그 욕구를 충족하는 일을 꾸준히 해나갔다. 그러나 주변엔 여전히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밥 잘 사고, 커피 잘 사는 지인 B는 자신이 욕심이 없는 줄 안다. 그러나 주변에선 B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회적 성취를 자식을 통해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안다. B의 자식들은 요즘 부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얻었다. 어쩌면 B가 주변에 인심을 베풀 수 있는 건 그가 가진 상위 욕구가 충족된 데 따른 충만함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자식들만 생각하면 안 먹어도 배부르고, 밥이나 커피 정도는 기꺼이 사면서 “난 욕심이 없어” 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B가 자식들 고교 시절 내신 관리를 위해 얼마나 열과 성을 다했는지를 지켜본 나로서는 그의 욕심과 A의 식탐이 막상막하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 욕구의 내용이 다를 뿐, 그걸 채우려는 에너지의 강력한 발산은 비슷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심각해지기 전 전망 좋은 카페서 만난 B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회사 일로 스트레스가 많은 B가 말했다. “내가 욕심(승진)이 없잖아.” 내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며 내가 물었다. “리얼리?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날도 밥은 B가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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