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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Sep 12. 2021

25. 늦되는 딸, 소녀 같은 엄마(1)

엄마가 쓰러졌다. 늦되는 아이였던 큰딸이 너무 안쓰러워 딸이 성인이 된 뒤에도 품 안의 자식처럼 여기던 엄마였다. 서른이 넘어서야 첫딸을 받아 든 아버지가 음력 2월 생일 그대로 호적에 올린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딸은 일곱 살에 입학 통지서가 나왔고, 그때까지 1에서 10까지도 한 번에 세지 못했던 딸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뒤늦게 남들의 속도를 따라잡게 된 딸은 불혹에 이르러서야 엄마가 사랑으로 감아놓은 정서적 탯줄을 풀기 위해 멀고 고단한 길을 돌고 돌았다. 그 세월이 10여 년, 조바심 난 딸은 쉬이 풀리지 않는 그 탯줄을 싹둑 자를 작정까지 했다.    

  

과연 그 탯줄은 잘린 것일까, 아니면 엄마의 의지로 푼 것일까.     

때늦은 결혼식 날이었다. 예식장으로 들어가는 높고 웅장한 문 앞에서 신랑 될 사람과 나란히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였다. 신부 도우미 분이 내게 속삭였다. “예식 중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 친정엄마와 눈 맞추지 마세요. 눈 마주치고 우는 신부가 많아요. 눈물 글썽이는 정도면 괜찮은데, 너무 울면 신부 화장을 고칠 재간이 없어요.”      


그 순간, 남들 졸혼할 나이에 무슨 결혼이냐, 난 이 결혼 반댈세 등 회사 동료들의 농담 같은 진담들이 떠오르면서 설마 이 나이에 그렇게까지 울까 싶었다. 게다가 스스로도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안 했기에 치아 교정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문 앞에서의 고민은 울어서 화장이 지워질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교정 장치한 입모습이 하객들에게 덜 부자연스러워 보일까였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교정 장치가 신경 쓰여 제대로 웃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표정으로 앞을 향해 걸었다. 식순에 따라 사회자가 시키는 대로 친정 부모님을 향해 돌아섰다. 안경을 끼지 않았는데도 엄마의 웃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듯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그때 알았다. 내 결혼이 늦은 게 아니라는 걸. 엄마가 탯줄을 풀려고 마음먹은 바로 지금이 내가 결혼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라는 걸 말이다.

 

엄마는 아들, 둘째 사위와는 결이 다른 첫째 사위를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맨 처음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못 들은 척이었다. 내가 너무나 ‘싱글’에 적합한 성향이었기에 그 반응이 의외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 의미가 “지금까지 잘살아왔는데 새삼 다 늦게 무슨 결혼이야”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고민하다 남친(현 남편)에게 결혼은 안 되겠다, 그만 만나자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남친이 의외의 말을 했다. 얼굴은 흙빛으로 낙담한 기색이 역력한 데도 “어른들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설득해가자”고 했다. 자존심 상해 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남친이 첫 만남 이후 가장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 날이었다.

     

그렇게 만난 지 9개월 만에 우린 법적 가족이 됐다. 가족이 되고 난 후 엄마는 밑반찬이며 떡국 쇠고기장, 손질한 갈치며 조기 등을 친정에 갈 때마다 한 보따리씩 싸주었다. 그리고 가족 생일 때마다 서울 수도권에 사는 친정 식구들은 모두 모여 축하 파티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진짜 가족이 돼 갔다. 그러다 코로나 한가운데 맞은 엄마의 팔순. 1년 가까이 가족 모임을 자제해왔지만 팔순만큼은 지나칠 수 없었다. 10명의 가족 모두 마스크를 끼고 인천 영종도, 엄마가 좋아하는 식당에서 가족 잔치를 했다. 자손들의 선물 증정과 친손자의 축하 플루트 연주가 끝나자 엄마는 마치 답사를 준비하기라도 한 듯 가족 아홉 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시의적절한 감사 인사와 덕담을 건넸다.  

 

팔순 잔치 후 4개월 만에 엄마가 쓰러졌다. 올케의 전화를 받고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엄마가 쓰러진다는 건 내 예상에 없는 일이었다. 외가에 치매 가족력이 있어 2개월 전에 엄마를 우격다짐해 뇌 MRI를 찍은 터였다. 아무 이상 없다는 의사의 판단을 받았기에 일시적으로 어지러워 쓰러진 것이겠거니 했다. 회사에서 그 전화를 받고도 끝까지 근무를 했다. 코로나로 병원 출입도 쉽지 않은 데다 그게 뇌출혈로 인한 것이란 것도 몰랐기에 태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가 지고도 빈 병상을 찾지 못해 헤매던 엄마의 앰뷸런스는 겨우 서울 동쪽 끝에 있는 병원의 빈자리를 향해 달렸다. 퇴근 후 여동생에게 전화했을 때, 경련을 일으키는 엄마를 부여잡고 있던 여동생은 거의 초주검이 돼 전화를 받았다. “언니야, 엄마가 이상하다며 우는 여동생 목소리를 듣고서야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코로나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엄마 곁을 지키는 것도, 면회도 불가능했다.  

   

그다음 날,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보려 했는데 하필이면 회사에 첫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회사엔 비상이 걸렸고 전 직원이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집에서 자가격리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엄마 쓰러지고 꼬박 이틀을 병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속만 끓였다. ‘뇌출혈’. 들어보기는 했어도 우리 가족과는 상관없는 질병인 줄 알았다. 엄마의 건강을 잘 살피고 있다며 오만했던 대가는 컸다.

     

내 머릿속 필름은 몇 개월 동안이나 엄마가 쓰러진 그날로 되돌아갔다. 내가 결혼을 안 했다면, 그래서 예전처럼 자주 부모님 집엘 들렀다면 미세한 전조 증상이나 이상한 기미를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하나 마나 한 되돌이표 가정과 질문들이 쳇바퀴처럼 머릿속에서 돌고 돌았다.

     

드디어 엄마의 수술 날 아침, 오후에 잡혀 있던 수술이 갑자기 오전으로 앞당겨졌다는 간호사의 전화에 회사에 있던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엄마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중환자실에서 수술실로 이동하는 복도에서의 30초 남짓인데 수술 시간을 겨우 30여 분 남겨놓고 걸려온 전화였다. 얼굴 한번 못 본 채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갈까 봐 세 번씩이나 전화해 수술 시간을 확인했는데 병원의 처사가 너무 야박했다. 울면서 회사를 뛰쳐나와 택시를 탔다. 지하철로도 거의 1시간 거리를 30분 가야 한다며 기사분에게 울며불며 사정했다. 상황이 심상찮다고 느낀 기사분은 기적처럼 나를 수술 시간 전에 병원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운 엄마가 나왔다. 전날 간호사와 통화하면서 엄마가 의식이 없다고 듣긴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 하고 외쳤다. 그 순간 엄마의 머리가 내가 있는 왼쪽 위를 향해 움직였다. 자동 반사적이라 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겨우 30초 동안 나와 남동생 부부,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엄마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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