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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Oct 03. 2021

26. 엄마와 병실에서 단둘이 맞은 추석

- 늦되는 딸, 소녀 같은 엄마(2)

뇌출혈 수술 후 2개월여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엄마는 요양병원으로 옮겨 5개월째 재활 치료를 이어갔다. 옮겨가서도 콧줄로 경관식(비강을 통해 소화기로 유동식을 주입해 영양을 공급하는 방법)을 하던 엄마는 발병 후 6개월 만에야 입으로 음식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엄마가 섬망 등 이상 증세를 보여 뇌 CT를 찍기 위해 대학병원으로 외출 나온 날, 온 가족이 모였다. 거리 두기 4단계로 요양병원에서 면회를 못 한 지 한 달이 넘어가던 차여서 여동생 부부가 요양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엄마를 모시고 올 때 엄마 얼굴을 보기 위해 나와 남동생 부부, 외삼촌까지 대학병원으로 모였다. 나는 미리 휠체어를 빌려 대기했다. 엄마가 들러야 할 진료과만 3개, 내게 주어진 미션은 접수 등 행정적인 일이었다. 각각 맡은 소임에 따라 대학병원 여기저기를 뛰다시피 다녔다. 드디어 영상의학과에서 CT를 찍는 것으로 그날의 미션이 가까스로 점심시간 전에 끝났다.  

    

내게는 이틀 후 담당 교수를 만나 CT를 판독한 소견을 듣는 것과 엄마의 모든 진료기록을 발급받아야 하는 미션이 남아 있었다. 주보호자로 남동생을 지정해놓은 터라 딸인데도 가족관계 증명서와 엄마 주민증 등으로 가는 곳마다 관계를 증명하느라 모든 절차가 더뎠다. 드디어 엄마 차례가 돼 떨리는 마음으로 담당 교수 방으로 들어갔다. 담당 교수는 수두증(뇌 안에 뇌척수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이 의심되므로 요추천자를 시행해 뇌척수액을 빼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난 뒤 엄마 상태가 안정적이 되면 영구적으로 물 빼는 관 삽입술을 하는 게 순서라고 일러주며 가족과 상의해 시술을 할 건지, 한다면 언제 할 건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무슨 시술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의료 용어에 지레 겁먹은 나는 위험하지는 않은지 물었고, 의사는 부분 마취를 하는 아주 간단한 시술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말이지 의사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걸 뒤에 알았다. 담당 교수의 설명을 들은 뒤에도 내겐 진료기록 일체를 발급받아야 하는 미션이 남아 있었다. 모든 게 세분화돼 돌아가는 대학병원의 행정 절차는 50대인 내게도 만만치 않았다.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 보니 노인 몇 분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이쪽저쪽을 살피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단톡방 회의 끝에 우리 자매와 남동생 부부는 추석 전에 간단한(?) 시술을 받기로 했고 네 사람의 역할 분담도 빠르게 이뤄졌다. 그렇게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목요일 남동생 부부는 엄마를 대학병원으로 입원시켰고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에 병원으로 온 나는 명절 앞이라 여동생이 힘들게 구한 단기 간병인을 기다렸다. 사흘짜리 단기 간병인으로 유능하고 좋은 사람 구하는 건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한국인 간병인(간병인의 거의 90%는 조선족으로 보였고, 한국인이 간병하는 경우는 자녀인 경우가 대부분)은 일당도 20%나 더 높았다. 그래도 엄마 케어만 잘해준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저녁 6시쯤 한국인 간병인이 왔다. 아무리 봐도 누군가를 살뜰히 케어할 것 같지 않은 인상이었지만, 내 촉이 제발 빗나가길 바라며 시술이 시작되기만 기다렸다. 그날 밤 8시가 가까워서야 요추천자 시술이 이뤄졌다. 간병인이 있긴 했지만 시술이 끝나면 엄마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오려고 기다린 거였는데 그 시술은 정말이지 사람을 잡는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수술방도 아닌 간호 데스크 안쪽에 간이 칸막이로 가린 다음 전공의 2명과 4, 5명의 간호사가 엄마를 결박하다시피 붙잡고 요추에 뇌척수액을 뽑는 아주 굵은 주삿바늘을 꽂는 시술이었다. 부분 마취를 할 수밖에 없는 시술인데 그 통증이 어마 무시하다는 건 엄마의 공포에 질린 비명으로 알았다. 낯선 의료진에 둘러싸여 1시간 넘게 등 뒤에 두꺼운 주삿바늘을 정교하게 꽂는 시술이었다. 상황 인지가 안 되는 엄마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공포에 질린 비명과 함께 엄마, 아버지, 동생들, 자녀들 이름을 마치 살려달라고 애원하듯 불렀다.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1시간이 넘게 고스란히 그 과정을 들었던 나는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엄마의 공포는 가라앉지 않았다. 짙은 남색 유니폼의 간호사만 주변을 지나가면 거의 발작하듯이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렀고, 마침 간병인까지 비슷한 색상의 상의를 입고 있어 다른 색깔 옷으로 갈아입어 달라고 부탁했다. 간병인이 밝은 회색 상의로 갈아입고 오자 엄마는 조금 진정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밤 10시가 다 돼서도 섬망 현상이 계속됐다. 결국 엄마는 다인실인 병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간호 데스크 한구석에서 밤을 나야 했다. 도무지 간병에는 뜻이 없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려는 간병인을 뒤로한 채 나는 다음 날 출근을 위해 늦은 밤 병원을 나왔다.  

   

요추천자 시술을 위해 2박 3일간 대학병원에 입원했던 엄마는 퇴원 수속을 하고 다시 요양병원으로 입원해야 했다. 사흘 만에 되돌아가는데도 입‧퇴원 절차를 반복해야 했는데 이번엔 또 다른 복병이 생겼다. 엄마에게서 항생제 내성균이 발견됐다며 요양병원에서 재입원에 난색을 표했다. 대학병원의 코호트 병실은 만실이었고 요양병원 담당인 여동생이 총무부장과 담당과장에게 매달리다시피 해 3주 이상 격리하기로 하고 겨우 2인실(1인실이 만실이어서 2인실을 혼자 쓰기로 했다)을 배정받았다.


그런데 이번엔 간병인이 문제였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저녁이라 간병인 매칭 협회는 전화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그전의 4인 병실에 엄마를 재입원시키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요양병원에서 대기하던 여동생은 급하게 코로나 검사를 받고 엄마 간병을 위해 2인실에 엄마와 함께 격리됐다. 여동생은 파킨슨병과 초기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병원에선 전문 간병인과의 교대 외엔 더는 교대가 안 된다고 했지만, 여동생을 연휴 내내 병원에 묶어둘 순 없는 상황이었다. 병원에 사정해 한 번만 더 교대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 겨우 허락을 받았다.

     

마냥 천사표인 올케는 자기가 교대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올케는 중학생 아이도 있고 홀로 계신 시아버지, 홀로 된 친정어머니까지 돌봐야 해 추석 명절에 누구보다 바빴다. 반면 나는 시아버지 제사가 추석 2주 전이어서 추석 땐 시댁에 내려가지 않아도 돼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그동안 바쁜 회사 핑계로 크고 작은 집안일에서 열외였던 터라 이번만큼은 올케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내가 여동생에 이어 간병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추석 전날 아침 여동생과 교대를 했다. 아무 준비 없이 급작스럽게 격리병실로 들어가 이틀을 간병한 여동생의 안색은 초췌했다. 나는 사흘간 갇혀 지낼 준비를 최대한 해서 들어갔지만, 내 체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내 몸무게보다 가벼운 엄마지만, 하루에 대여섯 번씩 기저귀를 갈고, 욕창 방지를 위해 2시간마다 체위를 바꿔주고,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침대 시트를 가는 일은, 힘쓰는 일에 아무런 요령도 없는 내겐 중노동이었다. 격리병실이다 보니 간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음식을 한 숟갈씩 떠서 먹여드리고, 안 먹겠다고 도리질하는 쓴 약을 삼키게 하고, 양치질을 시켜드리는 데만 끼니당 1시간이 걸렸다.      


격리병실에서 글도 쓰고 책도 읽겠다며 가져간 노트북이며 책은 가당치도 않은 사치였다. 그렇게 추석날 아침을 맞았다. 여동생에 이어 간병 나흘째가 되자 엄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간호사들은 가족 간병의 힘이라고 했다. 편마비가 온 오른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해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고, 움직임이 정교하지 못한 왼손으로는 음식물이 끼어 불편한 치아에 엄지와 검지를 정확히 가져가기도 했다. 내가 체위를 바꿔주기 전에 스스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돌아눕기까지 했다.

     

엄마의 움직임이 좋아져 다행이라 여기기도 전에 이번엔 엄마의 과잉 행동(침대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막느라 바빠졌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이어졌다. 뇌출혈 환자가 낙상까지 한다면 그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 겨우 5평 남짓한 병실에서 엄마와 대화하고(1문 1답에서 2문 2답까지 가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도돌이표) 엄마를 쓰다듬고 팔다리를 주무르는 동안 엄마의 얼굴은 다시 평온함을 되찾아갔지만, 간병 이틀째인 추석날 오후에 나는 이미 파김치가 됐다.      


밖에선 올케와 여동생이 내가 몸살이라도 날까 봐 애를 태우며 간병인을 수소문했으나 연휴 마지막 날부터 일을 시작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코로나 와중에도 조선족에겐 추석이 큰 명절이었고 모처럼 긴 연휴에 가족들과 함께 보내려는 문화가 강해 다들 연휴 다음 날부터 일하기를 원했다. 게다가 내성균 환자 간병이라 간병비도 20%를 더 줘야 했다. 그러나 연휴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 나로선 연휴 마지막 날부터 교대해줄 간병인이 절실했고 20%에 웃돈을 더 준다고 했지만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회사에 출근을 못 할 상황임을 알리고 연휴 다음 날인 목요일 교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꼬박 나흘을 엄마와 함께 보냈다. 엄마의 와병 7개월 동안 내가 엄마를 온전히 간병한 건 그 나흘이 전부였다. 엄마가 쓰러지고 3개월간 걸어서 퇴근하며 집까지 울며 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겨우 나흘 만에 내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을 쳤다. 그땐 버스 두 정거장 거리를 맘 놓고 울기 위해 걸어 다녔다. 안경에 마스크까지 썼으니 지나다니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울 수 있었다. 순둥이였던 갓난아이 시절에도 이렇게 울진 않았을 듯싶었다.      


그런데 겨우 나흘 간병을 마치고 어렵사리 구한 60대 후반 간병인과 교대를 하는데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간병인 매칭 협회에 내성균 환자이며 3주간 1인실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걸 고지했음에도 병실에 들어와서야 내성균 환자라 간병을 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간병인에게 웃돈을 주겠다고 사정하느라 눈물 지을 겨를이 없었다. 마침 회진 들어온 담당의사가 분변 처리만 잘하면 건강한 성인은 감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을 해줘 겨우 간병인을 설득했다.      


그런데 이번엔 엄마가 그 간병인을 완강히 거부했다. 간병인이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다가가면 몸에 손도 못 대게 했다. 내가 다가가 안정시키고서야 엄마는 내게 몸을 맡겼다. 마침 점심때가 돼 간병인이 죽을 먹이려 하자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가세요” 하며 입을 꼭 다물고는 식사를 거부했다. 엿새 동안 딸들의 간병을 받은 엄마는 우리가 딸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편안함을 느낀 듯했다. 결국 내가 엄마를 구슬려 점심과 약을 먹이고 양치까지 시켜드린 다음 간병인에게 인수인계 사항을 전달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노트북과 책, 생필품 등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손에 들고 지하상가를 지나 역으로 가다가 결국 길을 잃었다. 회사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계속 간병을 할 수 있었을까?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그런데도 추석 연휴가 끝난 후 문을 연 좌우의 수많은 지하상가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연자실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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