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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Oct 12. 2021

27. 늦되는 딸, 소녀 같은 엄마(2)

- 삼 남매의 엄마로만 살았던 여인의 삶

50여 년을 엄마의 딸 역할에 더없이 충실하게 살았다. 엄마 또한 80년을 삼 남매의 엄마로만 살았다. 이런, 순서가 바뀌었다. 엄마가 자식들밖에 몰랐기에 그 엄마의 맏딸이었던 나도 ‘엄마의 딸’이 마치 내 정체성이자 존재의 이유인 듯 살았다. 아버지는 화투는커녕 술‧담배도 하지 않는 성실한 가장이었지만, 엄마를 살뜰히 챙기는 남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충실했지만 유독 엄마에겐 너그럽지 못했다. 천방지축 둘째딸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사랑받고 자란 엄마에게 아버지의 태도는 처음엔 어리둥절, 다음엔 분노와 슬픔, 절망과 체념 등의 과정을 거치게 했다. 엄마의 내면 어디에 그런 강인함이 있었을까. 엄마는 체념 상태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 삼 남매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쪽으로 정했다. 어쩌면 그 일련의 과정이 엄마의 적극적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세 아이의 엄마가 된 1970년대 초, 서른 즈음의 여인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초등 때부터 이웃 아주머니들로부터 공통적으로 들었던 말이 “Jasmine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라, 넌 특별한 딸이야” 같은 거였다. 또래보다 늦되는 아이였던 난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모른 채 성인이 됐다. 20대 후반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가서야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그 말들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됐다. 그 직장엔 나와 같은 말띠 동기가 둘이나 더 있었다. 아버지가 음력 2월 생일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바람에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간 나는 뱀띠들과 친구가 됐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두 살이 많은 용띠와도 친구가 됐다. 그러니 주변에서 동갑 말띠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갑자기 말띠 셋이 동기로 만나게 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내가 그들과 얼마나 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알게 됐다.     


동기 A는 나처럼 맏이였고 바로 아래 남동생이 있었다. 그의 부모에게 딸은 반가운 자식이 아니었다. 모든 관심과 애정은 둘째인 남동생이 독차지했고, A는 일찍 철든 아이로 자랐다. 뭐든 성실히 한 A는 공부도 잘했고 지방 도시의 국립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래도 그의 부모는 오로지 먹고 노는 데만 특출 난 아들을 우쭈쭈 하느라 딸의 성취에 대해선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재수, 삼수를 거친 그의 남동생은 결국 당시엔 수업료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전문대에 입학했다. 그래도 동기 부모님의 사랑은 오로지 아들이었다. A의 토로를 듣는 내내 속이 울렁거릴 만큼 괴로웠다.      


동기 B의 사연은 더했다. 말띠 해에 집 안방에서 태어난 아이가 딸인 걸 확인한 그의 아버지는 불기운이 미치지 않는 윗목으로 딸을 밀어 놨다고 한다. 친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들은 B는 부모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조부모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평상시 그의 거친 말투와 성정에 대한 의문이 그때 풀렸다. 그의 아버지는 말띠 딸이 재수 없다며 출생신고조차 한 해를 미뤄 B는 호적상으론 양띠였다. 우리가 그런 얘기를 주고받았던 때가 1990년대 중반이었으니 지금과는 또 다른 시절이었다. 요즘과 달리 그때만 해도 말띠, 범띠 여성은 팔자가 사납다는 터부가 당연시되던 때였다. 나는 집안에선 한 번도 들어보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한 편견과 편애였기에 동기들의 출생과 성장사는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동기들과의 만남 이후에야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이 특별했다는 걸 알았다. 서른이 훌쩍 넘어 첫딸을 받아 든 아버지는 그 조그만 존재가 너무 감격적이어서 신바람을 내며 서둘러 출생신고를 했다. 그것도 음력(2월)으로 올리는 바람에 그 조그만 아이는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아이들과 공부하느라 힘든 초등 시절을 보냈다. 초등 입학 후 3년간을 방과 후에 따로 보충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 때문에 엄마 또한 바빠졌다. 내가 등교를 하면 엄마는 서둘러 설거지며 집 청소를 마치고 막내 여동생을 둘러업고 학교로 달려가야 했다. 복도 창을 통해 내가 아침 자습 과제를 제대로 하는지 살피는 게 당시 엄마의 주요한 아침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학교 가는 내게 당부를 했다. “오늘은 이모 집에 가야 하니 공부 끝나고 일찍 집으로 와야 한다.” 엄마와 눈을 맞춘 채 엄마의 되풀이되는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내가 등교한 사이 엄마는 서둘러 집안일을 마쳤다. 그러고 학교로 가려는데 등교한 지 1시간밖에 안 된 내가 집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엄마는 깜짝 놀라 물었다. “Jasmine 어디 아파? 왜 벌써 와?” 그때 내가 우쭐대며 한 대답. “엄마가 오늘 일찍 오라고 했다고 선생님에게 말했는데 선생님이 조퇴해줬어.” 내 딴엔 엄마가 하라는 대로 선생님한테 잘 말해서 일찍 집으로 왔으니 칭찬을 기대하며 돌아왔을 것이다. 반면 내 말을 들은 서른둘의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의 학습 부진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초등 입학을 앞둔 겨울, 안방 창가에 나란히 세워둔 메주 7장은 내가 한 번에 세기엔 너무 많았다. 내가 하나 둘 세엣 다섯, 하면 엄마는 Jasmine 다시 세어봐, 그러면 난 하나 두울 네엣 다섯. 한 번에 다섯까지도 제대로 세지 못하는 딸의 입학을 앞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떤 날은 팔각형의 곽에 든 성냥개비가 학습 도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메주나 성냥개비나 일곱 살을 앞둔 내겐 너무나 버거운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 상태로 첫아이가 입학을 했으니 엄마의 마음은 좌불안석이었을 게 뻔했다. 엄마도 매일 아침 집안일을 끝내기가 무섭게 학교로 달려가 복도를 서성이곤 했다. 국어책 3페이지 정도를 3번 쓰는 게 자습 과제였던 어느 날, 휘리릭 자습 과제를 마친 1학년 철부지들은 둘, 셋씩 모여 떠들고 남자아이 몇은 책걸상 위를 건너 다니는 등 부산스러운 가운데 붙박이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딸이 걱정된 엄마는 교실 안으로 들어와 내가 뭘 하는지 살폈다고 했다. 3번씩 몇 페이지를 쓰는 게 버거웠던 나는 2번쯤 써놓고는, 과제를 다 못했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놀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책받침에 별을 그리고 있었다고 했다. 안타까운 와중에도 엄마는 그게 무척이나 신기했다고 한다. 초등 1학년이 별을 한 획에 그리긴 쉽지 않은데 다른 건 뒤처지는 아이가 별을 한 획에 그렸다니 말이다.      


엄마에게 초등 1학년 때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지금도 그 시절 내가 앉아 있던 교실의 자습 시간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과제를 미처 마치지 못한 데 대한 부채감으로 책받침 가득 별을 그리며 앉아 있던 아이. 그 아이가 제대로 자라는 데는 엄마 아버지의 노력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돌봄은 또래보다 뒤처지던 내가 3년 만에 다른 아이들 속에 자연스레 섞여 드는 데 큰 힘이 됐다. 초등 3년간 세 분의 여선생님은 또 다른 엄마처럼 나를 챙기고 거뒀다. 그 덕에 4학년이 되면서 체격은 물론 학습 능력도 다른 아이들과 엇비슷해졌다.      


다른 아이들이 때가 되면 하던 일을 나는 엄마와 선생님들의 눈물 어린 정성과 지도 덕에 3년 만에야 겨우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보통의 아이가 됐다. 그러나 엄마에게 숨 돌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은 아기 때부터 떼쓰며 울다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아 엄마는 그때마다 남동생을 안고 차가 달리는 도로를 마구 건너 병원으로, 한의원으로 달려가야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숨넘어가는 일은 그쳤지만 짓궂은 장난질은 끊이질 않았다. 한 번은 두어 살 위의 아이들과 어울렸다가 한쪽 팔 접히는 부위를 본드로 붙인 채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을 혼비백산하게 했고, 좀 더 커서는 주차된 오토바이 뒤에 줄을 길게 묶어 자기 팔과 연결해 다른 차 옆에 숨어 있다가 오토바이가 달릴 때 신바람을 내보려다 몇 미터도 못 달리고 팔을 부러뜨려 오토바이 주인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 물어물어 우리 집을 찾아온 오토바이 주인에게 아들 얘기를 들은 엄마 아버지가 얼마나 놀랐을지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아들이 크게 다쳤을까 놀란 엄마는 눈물 바람을 했을 테고, 속상한 아버지는 죄 없는 엄마에게 지청구했을 게 뻔하다.      


그런 엄마가, 세 아이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만이 존재의 이유인 듯 살아온 엄마가 지난가을 가족들과 조촐한 팔순 잔치를 한 지 100여 일 만에 쓰러져 8개월째 투병 중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우리의 삶’이라던가. 머리로 알던 이 문장을 가슴으로 이해하려면 얼마나 더 긴 세월이 필요한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건너고 있다. 나도, 엄마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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