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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Nov 07. 2021

29. soul food 꽃게양념조림

- 늦되는 딸, 소녀 같은 엄마(5)

늦은 결혼에다 바쁜 회사 일로 집안일이라곤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채로 생활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남편 덕이었다. 남편은 집안일도 마치 회사 일처럼 각을 잡고 했다. 마른 청소, 물청소, 흰 빨래, 검은 빨래, 이불 빨래 등 각각의 날짜를 정하고, 빨래는 세탁 시간까지 고려해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세탁기를 돌렸다. 남편은 새벽 출근하는 나를 회사에 데려다준 다음 집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 후 탈수가 끝난 빨래를 해가 잘 드는 거실에 널어놓고 출근하곤 했다.      


그런 남편의 수고를 알기에 퇴근 무렵이면 여느 주부처럼 ‘오늘 저녁엔 뭐 먹지?’ 하는 고민이 절로 고개를 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과는 반대 방향인 시장으로 향했다. 반찬가게로 가는 길 초입에 있는 생선가게 앞이었다. 생선 비린내를 피해 항상 재빨리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싱싱한 꽃게들이 내 발을 붙잡았다. 아, 꽃게는 엄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식재료였다. 그런데 지난 2월 엄마의 와병으로 봄 꽃게 철을 철인 줄도 모르고 넘겼고, 다시 가을 꽃게 철을 맞았다. 손질하는 게 어려워 내가 직접 사서 요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엄마가 만들어준 걸 당연한 듯 받아먹기만 했다. 몇 년 전 엄마가 활꽃게를 사서 깨끗이 손질해서 얼려준 걸 받아와서 엄마 요리법을 흉내 내 만들어 본 게 전부였다.      


싱싱한 꽃게를 보자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생선가게 앞에서 장승처럼 서 있었더니 종업원 청년이 어느새 내 옆에 붙어 서서 물건이 좋다며 꽃게를 집어 들어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라 1kg에 2마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 남편에게 꽃게 요리가 어떠냐고 톡을 했더니 반응이 신통찮았다. 그제야 남편이 예전에 얘기해준 게 떠올랐다. 꽃게를 먹다가 앞니 귀퉁이를 부러뜨려 치과에서 공들여 치료한 적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침 내일 하루 휴가를 냈으니 나 혼자 엄마가 해주던 꽃게양념조림을 해 먹기로 하고 바로 냉동실에 꽃게를 넣었다. 저녁은 냉장고를 뒤지고 털어 겨우 때웠다.      


다음 날, 남편이 출근한 다음 급랭시킨 꽃게 중 1마리만 꺼내 씻었다. 가시에 손을 다치지 않고 손질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인플루언서들이 올려놓은 손질법을 보니 흐르는 물에 빨리 솔로 씻어내라고 하는데 고무장갑을 껴서 손이 둔한데다 가시에 몇 번 찔리고 보니 식욕도, 요리할 의욕도 확 떨어졌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한번은 부모님 댁에 갔는데 엄마 손가락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어쩌다가 그랬냐고 물었더니 활꽃게를 손질하다 순식간에 집게다리에 물려 꽤 깊이 다친 거였다. 요즘엔 집게다리를 못 쓰게 한쪽씩을 잘라 파는데 그때만 해도 그대로 팔 때였나 보다. 싱싱할 때 손질해야 바로 요리를 하든, 냉동을 하든 맛이 보존된다는 생각에 서두르다 생긴 일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오히려 왜 조심하지 않았냐고 지청구했던 나는 얼마나 못된 딸이었을까. 그런 딸이 몸살로 밥 한술 뜨기 힘들 때도 밥 한 그릇 뚝딱하게 하는 음식이 바로 꽃게양념조림이었다.      


어느 시장에서든 싱싱한 꽃게만 보면 엄마는 입맛 까다로운 큰딸 먹일 생각에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렇게 손가락 물려가며 게를 깨끗이 씻은 다음에도 손질은 끝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급하게 먹다 딱딱한 꽃게 다리에 이라도 다칠세라 칼등으로 다리 부분을 으스러지지 않을 정도로 두드려 골고루 균열을 낸 다음 엄마표 양념장(고추장+된장+α인데 그 비율도, α도 알아두질 못했다ㅠㅠ)에 재운 다음 양파를 듬뿍 넣고 자작하게 끓여내면 탕도 아니고, 찌개도 아니고, 발갛게 골고루 양념 옷을 입은 꽃게조림이 완성됐다.      


그렇게 끓여낸 꽃게는 가위로 손질하기도 편했고, 그냥 씹어서 살만 발라 먹어도 이를 다칠 염려가 없었다. 게다가 많이 맵지도 않으면서 양파의 단맛과 고추장+된장의 환상적인 비율이 잘 어우러져 다른 반찬엔 젓가락이 갈 겨를이 없었다. 난 식사량도 적고, 속도도 한정 없이 느린 편인데 이 음식 앞에서만은 게 눈 감추듯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곤 했다.      


그래서 예전부터도 바닷가 지역으로 여행을 가거나 하면 혹시라도 그 비슷한 음식이라도 있나 싶어 식당 주인에게 물어보곤 했다. 하지만 어느 지역, 어느 식당에서도 엄마가 만들어주던 그 음식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걸 보면 그 꽃게양념조림은 엄마만의 비법 요리인 게 분명하다. 입맛 없을 때든, 아플 때든 그 냄새만으로도 나를 식탁으로 이끌었던 그 음식, 그 음식을 만들어주던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소통이 불가능해졌다. 코로 영양을 공급해야 했던 기간만 6개월이 넘었다. 수술에서 깨어나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후 문병 갈 때마다 내가 딸인 줄도 잊은 채 목이 마르다며 물을 달라고 애원하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간병인은 물이 기도로 넘어가면 위험하다며 못 주게 했다.      


그런 엄마를 병실에 남겨두고 나오곤 했던 대학병원에서의 3개월이 지나 이제 재활병원으로 옮겨 재활만 잘하면 콧줄도 빼고 입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며 기대했다. 7개월째에야 겨우 콧줄을 빼고 입으로 유동식을 먹을 수 있게 됐는데 기대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이번엔 수두증으로 인한 섬망이 심해져 다시 대학병원으로 옮겨 통증이 무시무시하다는 시술을 받았다. 그 힘든 시술을 견뎌내고 재활병원으로 돌아온 그날, 이번엔 항생제 내성균이 엄마의 발목을 잡았다.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내성균은 병원, 특히 고령 환자가 많은 요양병원에선 다른 환자에게 확산할까 제일 무서워하는 거였다. 예전에 머물던 다인 간병 병실로 엄마를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 3주간의 1인실 격리 명령에 따라 우리 삼 남매는 고민 끝에 여동생과 내가 간병인을 구할 때까지 6일간 간병을 하기로 했다.      


딸들이 간병하는 6일 동안 엄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비록 자녀를 알아보지는 못해도 언어 표현도 굉장히 풍부해졌다. 신기하게도 내게는 반말을 쓰다가도 의료진이 오면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누군가 병실 문을 노크하면 반사적으로 문 쪽을 향해 ‘네’라고 대답하기도 해 의료진들은 입을 모아 자녀 간병의 힘이라고들 했다. 그런데도 여동생은 초기치매에 파킨슨병을 앓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맏며느리였고, 나 또한 장시간 근무를 해야 하는 직장인이라 계속 간병하는 건 불가능했다.      


엄마와 한 공간에 있는 며칠 동안만이라도 병원에서 나오는 유동식 외에 바나나나 사과 등을 숟가락으로 긁어서 먹여드렸지만, 과연 어떤 간병인이 이런 가욋일까지 할까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졌다. 어떤 날은 날 보며 너무 반가운 표정을 짓는 엄마가 이제 나를 알아보나 싶어 “엄마, 내가 누구야? 내 이름이 뭐지?”하고 물었다. 그때 엄마의 표정은 아주 난처한 상황에 놓인 사람 같았다. 난감하고, 아주 미안해하는 듯한 표정, 슬프게도 엄마의 그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모든 걸 자식에게 다 내어주고도,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그렇게 내어주기만 하던 엄마는 6주째 1인실에서 격리 중이다. 병원 밖의 자식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간병인의 간식을 병원 행정실을 통해 넣어주며 잘 부탁한다고 전화하는 것밖에 없다. 엄마가 맛없는 환자식으로 연명하는 동안 입맛을 잃은 나는 살기 위해 대여섯 가지 영양제를 삼키고 단박에 입맛을 돌아오게 할 엄마의 그 음식을 떠올리곤 한다. 엄마가 만들어준 꽃게양념조림 하나면 밥 먹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데 지금은 밥 먹는 게 더없이 고역이다. 


나를 살찌운 그 음식을 언제쯤 먹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지금, 엄마의 마음은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까. 엄마와 나를 이어주던 soul food, 그 꽃게양념조림이 눈물 나게 그립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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