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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Dec 19. 2021

32. 다시 자식의 시간으로

- 늦되는 딸, 소녀 같은 엄마(7)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그동안 가슴에 큰 바위라도 얹힌 듯 몸이 지구 중심을 향해 맹렬히 파고들어 가는 듯한 중력을 경험했다. 아래로, 아래로 끝 모르게 추락하는 그 수직의 궤도에서 나를 끄집어낸 건 남편이었다. 둘레길이 잘 조성된 안산(서대문)으로 남편을 따라나섰다. 몇 주 새 가을에서 겨울 풍경으로 변신한 둘레길을 걸었다. 전망대에서 서울 일대 풍경과 먼 산에 걸린 구름, 그 구름으로 변화무쌍한 그림을 그리는 하늘을 봤다. 땅만 있는 세상도, 하늘만 있는 세상도 없건만, 그동안 땅만 바라보면서 땅굴을 깊이 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2주 전, 아버지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총기로는 50대 자녀들을 능가하는 아버지였기에 우리 삼 남매에겐 엄마의 뇌출혈 발병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엄마 와병 후 5개월간 아버지를 모시던 여동생이 갑작스레 시어머니를 모셔야 할 상황이 되면서 아버지 혼자 지내시던 지난 4개월의 공백을 놓칠세라 치매가 찾아든 것이었다. 세상에서 아버지를 제일 존경한다는 남동생은 말할 것도 없고, 5개월간 아버지를 모셨던 여동생에게 아버지의 치매는 또 다른 날벼락이었다. 그런 동생들 앞에서 내 감정 표현은 사치였다. 구순을 앞둔 노인에게 치매는 경천동지 할 일이 아니라며 동생들 앞에선 담담한 척했다. 그동안 나름대로 주말을 틈타 아버지 집에 들러 먹거리도 챙겨드리고 함께 식사도 하곤 했다. 하지만 엄마의 와병이 길어지면서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걸 알아차린 아버지의 마음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매사 걱정이 많았던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무심하리만큼 덤덤하고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귀가 어두워지고 보청기 착용에 실패하면서 아버지와의 대화는 1분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지금 여기’를 누릴 줄 아는 타고난 성품 덕에 아버지는 여든아홉 노인답지 않게 몸도, 마음도 건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아니었다. 엄마의 와병만으로도 우리 삼 남매는 혼이 반쯤은 나갔고 아버지 마음까지 세심하게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 빈틈을 치매가 파고든 것이었다.    


  

첫 번째 화살을 맞고 헤매다 두 번째 화살까지 맞은 기분으로 회사에 앉아 있는 건 더없는 고역이었다. 한바탕 난리 치듯 몰아치는 업무 와중에 연이어 걸려 오는 한가한 업무 관련 문의 전화에 어느 날은 소리를 꽥 지를 뻔했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30년 가까이 해온 일, 내 정체성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했던 그 일이 의미를 잃는 순간이었다. 자녀들도 못 알아보고 숟가락질조차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엄마와, 고혈압 약 부작용으로 혈압이 너무 내려가 비틀거리면서도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버지는 바로 20, 30년 후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런 깜깜한 미래가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데 회사에 출근해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지 답을 알고 싶었다.   

   

주중엔 회사에서, 주말엔 엄마 병원 아니면 아버지 집을 오간 지난 10개월. 대상포진에 걸려서도 휴가를 쓸 수 없는 회사 상황에서 체력의 한계를 제대로 경험했다. 인간이 온전히 타인만을 위해 슬퍼할 순 없다는 문장이 단박에 이해됐다. 매일 밤 눈을 감으면 잠이 아니라 걱정이 나를 에워쌌다. 부모님 걱정인 듯싶지만 결국엔 내 걱정이었다. 가까운 미래는 부모님 걱정으로(그조차도 내가 치러야 할 것에 대한 걱정), 먼 미래는 내 노후 걱정으로 슬프고 막막했다. 엄마를 케어하는 건 연로한 아버지가 아니라 모두 자녀들 몫이었다. 자녀 셋과 그 배우자까지 여섯 명이 엄마, 아버지를 돌보는 게 어찌 이리 힘겨울까. 부모는 열 자식을 거둬도 열 자식은 부모를 못 모신다는데 체력이 바닥난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갖가지 생각으로 꽉 찬 머리를 인 채 남편과 2시간쯤 걷고 나니 혈액순환이 잘 돼서인지 뻣뻣하던 몸의 관절들이 풀리고 가벼운 허기가 느껴졌다. 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위와 뇌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지난가을 두어 달가량 식욕을 잃어 단백질 가루를 탄 두유로 끼니를 대신하던 때에 비하면 허기와 식욕은 반가운 손님이었다. 일단 먹자, 국수든 김밥이든 씹어 삼킬 만한 것이면 뭐라도 먹고 힘을 내야 했다. 그렇게 남편과 시장에 들러 배를 채우고 나니 딱 그만큼의 배짱이 생겼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자. 큰딸로서 사랑받았으니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결정을 하고 나니 조금씩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면 하루치만큼, 일주일이 지나면 일주일치만큼 가벼워지겠지.  

    

한동안 나 살기 바빠 자식의 시간을 잊은 채 살았다. 세상은 무질서한듯싶지만 그렇지 않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받은 건 갚아야 한다. 받지 않았는데 내놔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건 받은 걸 기억하지 못해서이지 받은 게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일 것이다. 이제 미처 다하지 못한 자식의 시간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빈속을 국수와 김밥으로 가득 채웠는데도 몸이 오히려 가벼워졌다. 발걸음은 더 가볍다. “엄마, 아버지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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