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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Nov 28. 2021

31. 아이가 된 엄마, 잊힌 아버지

- 늦되는 딸, 소녀 같은 엄마(6)

엄마가 쓰러진 지 9개월. 엄마의 일상은 엄마의 의지가 아니라 의료진과 간병인에 의해 계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동안 무너진 건 내 일상, 아니 내 건강이었다. 처음엔 하루아침에 쓰러져 엄마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상황이 기가 차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그나마 회사에선 해야 할 역할이 있고, 동료, 선후배들 눈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제어가 됐지만 퇴근길은 달랐다.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버스 두 정거장 거리를 울면서 걸어 다녔다. 2월 말, 3월 초의 차가운 날씨에 코로나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은 제 갈 길 바빠 내가 울며불며 걸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봄이 오고 벚꽃이 눈처럼 날릴 때까지 2개월여를 퇴근길에 울면서 걷고, 걸으면서 울고를 번갈아 하면서 집으로 오곤 했다.      


화창한 봄날 탓, 아니 덕분이었을까. 어느 순간 더는 울지 않게 됐다. 한 사람이 평생 흘리는 눈물도 총량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에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내 몸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직업병이었던 안구건조증이었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걷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무릎, 발목, 발가락까지 모든 관절이 태업을 선언한 듯 하루 5km 걷기를 실천한 지 1년 만에 걷기를 멈춰야 했다. 그때부터 소화 기능이 떨어지더니 잇몸이 붓고 아파 음식을 씹기가 어려워지고, 뒤이어 식욕이 사라졌다. 조금만 먹어도 체해서 편두통이 생기니 뭔가를 씹어 먹는 게 두렵기까지 했다. 밥을 못 먹는 대신 갖가지 영양제를 삼키고, 단백질 가루를 두유에 타서 마셨다. 그런 내가 위태로웠는지 남편은 주말마다 고기를 먹게 하려고 애를 쓰고 속이 허해진 나는 고기 냄새가 역해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내 일상은 빠듯하게 이어졌다. 새벽 5시 50분 출근해 12시간 가까이 회사에 있다가 퇴근하면 서둘러 바나나 주스나 단백질 가루 탄 두유 한잔으로 저녁을 때우고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다음 날 출근을 위해 눈 찜질팩을 쓰고 잠을 청하지만 불면증이 시작됐다. 점심시간 파워워킹까지 그만둔 상태이니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잠조차 내게 등을 돌리니 사면초가가 따로 없었다. 안과, 내과, 치과, 이비인후과 등 다양한 진료과를 마치 쇼핑하듯 들르다 보니 약봉지만 가방 한가득이었다.      


엄마 면회가 허용되지 않던 어느 금요일, 남편이 운전하는 차로 혼자 지내시는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 난데없는 멀미에 결국 차 조수석 의자를 펴고 드러누워야 했다. 과로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데다 휴가를 원하는 날짜에 쓸 수도 없는 상황. 무슨 징크스인지 내가 아플 때면 그 주엔 이미 휴가자가 예정돼 있었다. 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자칫하면 팀장 갑질로 비칠 수도 있기에 약 기운으로 버티며 출근했다. 아무리 아파 죽을 지경이어도 회사에서 티 내지 않고 일하는 게 생활화되다 보니 후배들에게는 물론 상사에게도 앓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미련함이 독이 됐던 걸까, 결국 대상포진에 걸렸지만 그 무렵은 회사가 연중 가장 바쁜 주간을 앞둔 때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상했다. 뇌출혈 수술 후 안정적이던 엄마가 수두증으로 다시 대학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되고 6주나 1인실에 격리되는 와중에 아버지는 내 안중에 없었다. 보청기 착용에 실패해 일상 대화는 힘들어도 걱정을 가불하지 않는 성품이어서 종일 TV를 친구 삼아 잘 지내던 아버지였기에 더 그랬다. 나와 동생들이 엄마의 상태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으나 엄마의 와병이 9개월째가 되면서 아버지의 총기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져 간다는 걸 알아차린 여든아홉의 아버지는 동년배에 비해 월등히 건강했던 게 무색하게 급속도로 의기소침해졌고 깜빡깜빡하는 증세가 잦아졌다. 남동생 부부가 다녀간 다음 날 방문한 내가 어제 누가 다녀갔냐고 물어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 냉장고 안에 손도 안 댄 채여서 왜 안 드셨냐고 물어도 “몰라” “그 음식이 냉장고에 있는 줄 몰랐다”는 답이 이어졌다.     


결국 지난 주말 삼 남매의 배우자까지 6명이 남동생 집에 모였다. 아버지를 계속 혼자 지내시게 할 수는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전업주부인 여동생이 마침 시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가셨으니 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했다. 나는 맞벌이에다 건강 상태도 불안정하고, 남동생네 또한 맞벌이에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의 아이가 있었다. 마침 여동생 아들은 내년 봄 군 입대를 앞두고 있고 제부 또한 일 때문에 몇 년간 지방을 오가야 하는 상황인 데다 붙임성 좋은 푸들까지 있어서 아버지가 지내시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흔쾌히 아버지를 자기 집에서 지내시게 해 준 제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은인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가까이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 거취가 정해지면서 큰 시름을 덜었다.      


아버지가 간단한 옷가지를 꾸려 여동생 네로 가시고 이제 부모님 아파트는 주인 잃은 신세가 됐다. 이제 다시 엄마에게 집중해야 할 때, 일이 조금 일찍 끝나는 금요일 오후에 엄마가 새로 옮겨간 재활요양병원으로 갔다. 코로나 확진자 증가로 다시 비상이 걸린 병원에서는 가족 면회를 실내가 아니라 건물 지하로 들어가는 주차장 입구에 임시 칸막이를 하고 난로를 군데군데 피워놓는 식으로 면회실 비슷하게 만들어놓았다. 언뜻 보면 교도소 면회실 풍경 같기도 했다. 초겨울 바람이 부는 날, 실외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가로세로 1m도 안 되는 유리창 앞에 남편과 둘이 붙어 서서 엄마가 타고 내려올 엘리베이터가 어서 올라가서 엄마를 태우고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린 지 5분 남짓,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백발의 커트머리를 한 엄마가 간병인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 우리 부부가 붙어 선 유리창 앞으로 다가왔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건물 안쪽의 엄마와 소통해야 했는데 그조차도 엄마가 아니라 간병인과 해야 했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그래, 그래, 거기 있거라”라고 또렷하게 말했다. 엄마의 인지 상태를 잘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엄마가 마치 내 마음고생을 알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타이르는 것처럼 여겨졌다.      


칠순 가까워 보이는 조선족 간병인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지가 안 되는 환자 간병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엄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신체적 통증은 없는 듯한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간병인은 엄마가 하루 걸러 하루씩 밤잠을 안 자고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한다는 것과 식사는 잘하신다는 것, 가끔 식후에 요거트를 드리면 맛있다는 표현을 한다고 했다. 겨우 10분 만에 면회가 끝났다. 엄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하면서 딸인 내가 아니라 등 뒤에서 휠체어를 미는 간병인 쪽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 모습은 지금 엄마의 상태를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아이가 된 엄마의 안위는 딸인 내가 아니라 나보다 나이 많은 간병인 손에 달려 있었다.      


눈물을 닦고 병원 근처 마트로 가서 귤과 사과를 샀다. 병원 입구에서 직원을 통해 간병인에게 전달해 달라고 맡겼다. 간병인이 귤 하나 까서 먹을 때 한 조각이라도 엄마 입에 넣어주기를, 사과 깎아 먹으면서 숟가락으로 한 스푼이라도 긁어서 엄마 입에 넣어주기를 기도하면서 병원을 나서는데 허리가 꺾일 듯 허기가 몰려왔다. 내가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란 사실이 싫었고, 그런 순간에 허기를 느끼는 내가 사람 같지 않아서 슬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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