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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Feb 27. 2022

37. 나를 충만케 하는 것들(1)

- 리추얼(ritual·儀禮)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은 한동안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의 책에서 그가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였다. 그와 나의 공통점은 바로 리추얼(ritual·儀禮‧‘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과 공간에 대한 강렬한 열망(‘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이었다.    

  

리추얼은 일상에서 반복되는 일정한 행동 패턴을 뜻한다. 언뜻 습관과 비슷해 보이지만 리추얼에는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에게는 독일 유학 시절의 아침 식사가 그랬다. 아내가 집에서 차려 주는 화려한 독일식 아침 식사는 레스토랑에서 외식할 여유가 없는 유학생 부부의 가슴을 데우는 행위였을 것이다.      


내게도 아주 오래된 아침 식사의 리추얼이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에서 나는 여유로운 업무 시작을 위해 동료들보다 1시간가량 일찍 출근하곤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만의 리추얼이 이뤄진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우유에 커피를 타서 만든 카페라테를 떡과 함께 먹으면서 신문을 읽는다. 이때 라테 한 모금과 떡 한 점이 입 안에서 이루는 조화는 곧 업무가 시작된다는 신호로, 내 머리를 기분 좋게 깨운다. 그 순간의 여유로움과 호젓함은 가슴을 말랑말랑하게 하고 내게 주어진 책상과 공간에 감사를 느끼게 한다.     

 

이 리추얼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2000년부터 시작됐다. 언어가 다른(서울과 부산의 거리만큼이나 먼) 사람들이 주는 낯섦,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이 나를 따라다녔던 시절. 부산에 다녀오려고 휴가를 내면 동료들은 시골 내려가냐고 알은체를 했다. 그때마다 나는 시골 아니고 제2의 도시로 가는 거라고 했지만, 서울특별시 사람들에게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시골 사람이었다.    

 

혼자 꾸려가는 서울살이가 막막한 가운데 설레기도 했던 데는 나만의 아침 식사 리추얼이 큰 몫을 했다. 떡 만드는 과정을 수료해 엄마가 차려 주던 밥상 대신 우유를 데우고 커피를 넣어 저으며 향을 음미하고 내가 만든 떡으로 차린 소박한 아침상. 그때 시작된 아침 식사의 리추얼은 30년 넘게 살았던 곳을 떠나 뛰어든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주눅 들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주곤 했다.      


서울에 올라온 초기엔 데운 우유에 홍차를 우려 마셨다. 지금보다 꽤 날씬했던 그 무렵엔 커피를 마시면 팔이 떨릴 정도로 카페인에 예민했다. 그나마 홍차의 순한 카페인은 내 체질에 잘 맞았다. 한 모금의 뜨거운 물에 홍차를 우린 다음 데운 우유를 섞어 마셨다. 그땐 카페에 ‘밀크티’라는 메뉴조차 없을 때였다. 그렇게 10년이 훌쩍 넘는 동안 나의 아침은 밀크티와 함께 시작됐다. 그러다 누구도 피해 가기 힘든 나잇살이 찌면서 커피 한잔 정도의 카페인은 거뜬히 견딜 맷집이 됐다. 살이 쪄서 좋은 단 한 가지는 카페라테를 마실 수 있다는 것.


휴직한 뒤에도 아침 식사엔 밀크티나 카페라테가 빠지지 않는다. 혼자만의 리추얼에서 남편이 함께한다는 게 달라졌고, 떡 대신 빵이나 고구마에 샐러드까지 메뉴도 다양해졌다. 우유에 카페인이 든 뭔가를 타서 마시는 리추얼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라 전혀 다른 경험치를 가졌어도 사람의 마음을 데우는 지점엔 음식이 있다. 단순히 배고픔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정서적 공복감까지 채워주는 그와 나의 리추얼. 내일도 그 리추얼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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